가을 바람이 보통 벌 넓은 들 무르익은 벼이삭을 건드리며 논과 몰려왔다.
하늘은 파―란 물을 지른 듯이 구름 한 점 없고 잠자리같이 보이는 비행기 한 쌍이 기자림 위에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열두시의 기적이 난 지도 이십 분이나 지났다. 신작로 옆에 '평화고무공장' 하고 쓴 붉은 굴뚝을 바라보며 벤또통을 누렇게 되어 가는 잔디판 위에 놓고 관수는 '마꼬'를 한 개 붙여서 입에다 물었다. 점심을 먹고 물도 안 마신 판이라 담배가 입에 달았다. 한번 힘껏 빨아서 후우 하고 내뿜으며 그대로 언덕을 등지고 네활개를 폈다. 눈은 광막한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파―랗게 점점 희미해져서 없어지는 담뱃내가 얼굴 위에 어울거리다 풀숲을 스쳐서 오는 바람을 따라 그대로 없어지곤 하였다. 그는 연거푸 그것을 계속하였다.
―---염려 마라 우리에겐 조합이 있고 단결이란 무서운 무기가 있네.
신작로 위에를 뛰어가며 하는 직공의 노랫소리가 쟁쟁하게 들려 왔다. 철롯길 옆이라 먼 곳에서 오는 듯한 기차의 소리가 땅에 울려 왔다. 그 밖에 이 넓은 보통 벌에는 가을 바람에 불리는 벼이삭의 소리가 살랑살랑할 뿐이다.
때때로 관수의 마음은 몹시 가라앉았다. 혼자서 담배를 빨며 앉았으면 초조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최근에 이르러 자기가 완전히 초조하여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자기 앞에 남겨 놓은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있는 데까지의 지혜와 경험을 털어서 모든 것을 해보았어도 일은 마음대로 되어 가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조그만 불평불만이라도 잡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불평불만을 대표하여 그의 선두금은 하나도 없었다.
관수도 무엇인지 똑똑하게는 몰라도 자기에게 결함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럴 때마다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지나간 여름 파업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몹시 전열이 혼란해져서 입으로 옮길 수 없는 악선전이 공장과 공장을 떠돌 때에 돌연히 잠깐 참말로 번개같이 잠깐 동안 만났던 어떤 사나이한테서는 그 후 지금까지 두 달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사나이가 지금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침착한 태도로 말하던 그 사나이는 말하는 품으로 보아서 결코 이곳 사람은 아닌데 그때 파업의 사정과 또 파업 수습에 관해서 일후에 활동할 것을 어떻게 그렇게 똑똑히 아는지 몰랐다. 평양의 모든 일을 환하게 꿰어 두고 이곳서 사는 사람보다도 잘 알았다.
그를 만난 이후 관수는 혼자서 생각하였다. 물론 누구에게도 그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자기에게 그 사나이와 만날 시간과 장소를 가르쳐 준 일환이는 그때 벌써 폭력행위 위반으로 끌려갔을 때였다. 좌우간 일환이와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인 줄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일환이는 어떻게 이 사나이를 알았을까?
파업 때에 관수가 자기와 아무 면식도 없는 사람과 이렇게 만난 적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이 방울 같은 눈을 가진 사나이는 그들과는 어느 곳인가 다른 곳이 있었다. 이 사나이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공상 같았다.
...책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