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참을 수 없다.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나는 나도 알 수 없는 힘에 지배되어 팔을 벌리고 눈을 뜨면서 벌떡 일어난다. 결국 굳센 내 두 팔에 잔뜩 안긴 것은 나를 덮었던 이불이다. 내 눈앞에는 으스름한 창문이 보일 뿐이다. 나는 한숨을 휴 쉬었다. 지금 그것이 허깨비인 줄 모르는 것이 아니로되, 그래도 무엇이 보일 듯하고, 무엇이 들릴 듯하게 마음에 켕긴다.
“백금아! 백금아! 백금아…….”
나는 나도 알 수 없이 구석을 노려보면서 나직이 불렀다. 보이기는 무엇이 보이며, 들리기는 무엇이 들려? 으슥한 구석에 걸린 의복이 점점 환하게 보이고 창을 스치는 쌀쌀한 바람 소리만 그윽할 뿐이다.
“흥! 내가 미쳤나?”
내 몸은 힘없이 자리에 다시 쓰러졌다. 머리는 띵하고 가슴은 쩌릿하다.
슬그니 덮은 두 눈딱지까지 천 근 쇠덩어리같이 눈알을 누른다. 또 온갖 사념이 머리를 뒤흔들고 열이 올라서 잠을 못 이루게 한다.
백금이 간 지가 벌써 몇 달이냐? 그가 갔다는 이 선생의 손으로 쓰신 어머니의 엽서를 받던 때는 청량리 버드나무 잎이 바야흐로 우거졌던 때더니 벌써 그것이 떨어지고, 삼각산에 흰눈이 내렸다. 성진(城津) 동해안(東海岸) 공동 묘지에 묻힌 그의 어린 뼈와 고기는 벌써 진토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의 영혼이 있다고 하면 마천령(魔天嶺)으로 내리쏠리는 쓸쓸한 바람 속에 누워서 이 밤 저 달 아래 빛나는 바닷 소리에 얼마나 목메인 울음을 울까?
백금이는 내가 스물 한 살 때, 즉 신유년 7월 22일에 서간도(西間島)에서 낳은 딸이다.
“손자가 나면 백웅(白雄)이라고 하쟀더니 손녀니까 백금(白琴)이라 하지!
백두산 아래에 와서 얻은 거문고라고 허허.”
이렇게 아버지께서 그 이름을 지으셨다. 백금이는 거칠은 만주 산골에서 낳기는 하였으나 어머니(아내)나 아버지(나)보다도, 할아버지(아버지)와 할머니(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곱게곱게 컸다.
그러나 악착스런 운명은 우리에게 평화로운 날을 늘 주지 않았다. 백금이 두 살 되던 해 가을이었다. 어머니, 아내, 백금, 나 이 네 식구는 아버지와 갈리게 되었다. 소슬한 가을 바람에 낙엽이 흩날리는 삼인방(三人坊) 고개에서 아버지와 작별할 때 점점 멀어지는 할아버지를 부르면서 섧게섧게 우는 백금의 울음에 우리는 모두 한숨을 짓고 눈물을 뿌렸다. 아버지는 우리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그 고개 마루턱에 지팡이를 짚고 섰었다.
태산 준령을 넘어서 북간도 얼따오꼬우〔二道溝[이도구]〕에 나온 우리는 이듬해 즉 백금이가 세 살 나던 해 봄에 두만강을 건너서 회령(會寧)으로 나왔다. 이때부터 백금이는 어정어정 이웃집으로도 걸어다니고 쉬운 말도 하고 어른들이 가리키는 것을 집어 오기도 하였다. 온 집안의 정성과 사랑은 더욱 더욱 그에게 몰렸다. 어머니께서는 맛나는 것만 얻으셔도 백금이 백금이, 이쁜 것만 보셔도 백금이 백금이 하여 귀여워하셨다. 심지어 그때 우리 노동판 회계인 T의 내외분까지 백금 백금 하여 자기 자식같이 받들었다. 내가 노동판에서 늦게 들어가서 기침을 컹 하고 문을 열면 어미 무릎에서 젖을 먹던 백금이는 통통 뛰어나오면서,
“해해 아부지! 아부지! 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