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이면, 두려움이 자라나는 그곳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잔잔한 일상을 끊임없이 흔드는 김솔의 농담들
◎ 도서 소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얼굴,
김솔만의 감각으로 그린 군상화
“이미 모든 책들이 책에 대한 책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모든 인간은 모든 인간의 꿈으로 빚어져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_p. 142 『기록』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8년 간, 두 권의 소설집과 네 권의 장편소설을 펴내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소설가 김솔이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아르테)을 선보인다. 이번 소설집은 2017년 ‘세계의 믿지 못할 이야기’들을 특유의 몽상적인 문장들로 풀어낸 짧은 소설 모음집 『망상,어語』에 이어 3년 만에 발표한 두 번째 짧은 소설 모음집으로, 밀도 높은 현재성과 기발한 상상, 이국적인 인물과 문체 등 오직 김솔만이 선보일 수 있는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김솔은 역사, 과학, 윤리, 종교, 철학, 신화 등 해박한 지식을 작품에 인용하여, 이 시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이슈들을 문학적으로 빚어내는 글쓰기를 지속해왔다. 특별할 것 없고 보편적일 수 있는 하나의 상황조차 역사적 사실과 접목해 문명적 흐름이라는 거시적 관점으로 옮겨와 현 시대를 조망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빚어내는 데, 이런 전환의 힘은 김솔 소설만의 백미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작은 변화나 위협으로 얼핏 드러났다 사라지는 아이러니의 순간들은, 김솔의 작품에서는 그가 구축한 알레고리에 의해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는 단서가 된다. 특히 이번 소설집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은 국적을 넘나드는 다양한 장소와 인물 들이 등장하는 40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통해 이 시대가 필연적으로 품는 아이러니와 그 근원을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깊은 물 아래 잠들어 있던 괴물 같은 세상의 실상이 어느 순간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앞에 선 인물들은 진실 혹은 몽상, 어쩌면 그 어느 곳도 아닌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일상이 균형을 잃는 순간 감지되었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을 통해 맞닥뜨리게 된다. 40편의 군상화 같은 이야기에서 겹쳐지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진실과 몽상 사이를 서성이는 인간, 김솔식 슈뢰딩거의 고양이
“굳게 닫힌 문은 침묵처럼 틈 없이 단단했고 어둠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문을 두드리는 순간 모든 기억이 산산이 부서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문 안쪽이 스스로 밝아지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서성였다.”
_ p. 304 「그녀 앞에서: 카프카의 「법 앞에서」변주곡」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속 인물들은 국적도 나이도 성별도 모두 다르지만, 작가가 포착한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삶의 균열에 붙박여 있다. 그들은 일상이 기묘하게 흔들리며 틈을 벌리는 순간을 저마다 경험하는데, 이 작은 균열을 통해 본능적으로 ‘세상의 이면’을 감지한다. 아무도 직접 경험해본 적 없고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장소인 그 미지의 영역은 김솔이 글쓰기를 통해 끈질기게 부딪혀온 경계, 지우며 나아가고자 했던 궁극의 가장자리와 맞닿아 있다.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은 이 경계를 마주한 소설 속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 내고 있는 이야기이자, 김솔 작가의 끊임없이 잔잔한 일상을 흔드는 ‘시도’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 있는 한 걸음일 수도, 방향을 잃은 채 끝없이 헤매는 몽상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김솔은 인간이 ‘도저히 설명 할 수 없는 암흑과 고요(「여행」)’를 신의 이름으로 명명한다고 보았는데, ‘절대적인 것에 편의적으로나마 이름마저 붙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설명조차 할 수조차 없’고 ‘대상을 통해서만 자신을 인식하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언어를 통과해 인간의 인식 속에 안착될 때 실재보다 축소되는 것이 필연적이라면, 미지의 영역은 온전히 이해되지 못한 채 영원히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김솔의 관점은, 인간 인식의 필연적인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연상케 한다. 그렇기에 그 경계 앞에 주저앉아 조금도 나아가지 않기를 선택한 인물뿐만 아니라 거짓을 선택한 인물조차 김솔의 세계에서는 동등한 지위를 얻게 되고, 죽음과도 같은 미지의 벽 앞에 선 인물들은 모두 ‘살아남은 자’가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목소리에 따라 우리는 그 세계를 때로는 안개 속을 걷듯 몽환적으로, 때로는 귀엽고 발랄하게 여행하듯 통과하게 될 것이다.
허상 위에 지어진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
“법적 공방은 먼저 흥분한 자들이 반드시 패배하는 게임이다.
상대가 틈을 보였다 싶으면 가차 없이 찔러대라.
대중이 보는 앞에서 서로에게 침을 뱉거나 욕설도 퍼붓고 신발도 벗어던져라.
그러면 대중은 당신들의 사연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무의미한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할 것이며 당신들을 위해 기꺼이 싸워줄 것이다.”_ p. 168 「형제」
여덟 살 차이나는 쌍둥이 동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소녀(「복제」)와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의사(「가려움」)가 동원하는 과학적 사실부터 아내의 공공연한 배신을 끝까지 부정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를 복기하는 남자(「믿음」)까지,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의 인물들은 역사적·과학적 사실과 신화까지 적극적으로 동원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인용한다. 김솔은 하나의 인물이 주장하는 바를 위해 방대한 학문적 자료와 지식을 아낌없이 치밀하고 설득력 있게 덧붙이는데, 이는 무해한 진실이라 여겼던 모든 것들이 개인의 감정에 동원되었을 때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당연하다 믿어왔던 사실들에 김솔이 만들어낸 작은 알레고리만으로도 예측 불가한 결말이 되어버린 40편의 이야기를 모두 읽었을 때쯤엔, 우리는 역사적으로 반복되었으나 쉽게 삭제된 모든 혼란을 직시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사는 이 다채로운 여러 개인의 욕망과 감정의 추동이 부딪히며 만들어진 궤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김솔의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우리 한 사람의 생애보다 더 오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더 오래 존재할 문명의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이다. 문명은 늘 옳은 방향으로 나아왔는가. 역사가 진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더욱 가속화하는 이상기후, 새로운 전염병의 창궐과 같은 ‘새로운 징후들’은 이제 인간이 기존의 방식대로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한계에 다다랐다는 증거는 아닌가. 그렇게 김솔은 인간이 걸어온 모든 길을 탐색하면서 모든 방향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 본문 소개
평온함이란 권태나 허무처럼 불완전한 상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거기서 전쟁과 살인과 증오와 죽음이 태어나는 것이다. _ p.12 「생일」
동생이 태어난 뒤로 저는 갑자기 어른이 됐답니다. 누군가 강제로 제 등을 떠밀어 그런 상태에 밀어 넣은 것이에요. 그랬더니 그동안 제가 결코 시도해보지 않았던 행동과 사고를 하게 됐지요. 무엇보다도 어른들의 윤리적 기준을 이해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수긍하게 됐으니, 이 또한 여덟 살 차이 나는 쌍둥이 남동생의 존재만큼이나 놀라운 사실이었지요. _ p.19 「복제」
머리 위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우주의 역사에 대해 고작 1퍼센트도 알지 못하는 인간이 망원경을 통해 우주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건 무력한 개인과 광대무변한 신이 아닐까요? 인간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암흑과 고요를 어떤 자는 부처라고 일컫고 어떤 자는 여호와, 어떤 자는 알라, 그리고 어떤 자는 시바라고 일컫는 게 분명합니다. 절대적인 것에 편의적으로나마 이름마저 붙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조차 없으니까요. 인간은 늘 대상을 통해서만 자신을 인식한다고 배웠습니다._ p.46 「여행」
비의 기세가 여전한데도 노인은 옷깃 한번 추스르지 않고 태연하게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자신의 눈엔 빗줄기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몸 또한 비에 젖지 않는 것처럼. 페루의 새들처럼. _ p.72 「이름」
백주의 한복판에서 참, 괴이한 광경을 보았어. 갑자기 흑단나무 널보다도 더 검고 납작한 그림자가 일어나더니? 바람 한 점 없었으니까, 더 가볍고 마른 것들에게도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했겠지? 빈 소주병보다 창백한 어떤 남자의 멱살을 붙들고 자신이 누워 있었던 짓무른 자리 위로 밀쳐내는 거야. 그림자는 남자의 호적상 나이보다도 더 오래 누워 있었다고 투덜거렸어. 그러니까 그림자와 남자는 견고한 스위치처럼 발목을 같이 쓰고 있어서 한쪽이 일어서면 한쪽이 쓰러지게 되어 있나 봐. 생은 좁고 무른 존재의 이유에 붙박여서 앞뒤로 불안하게 흔들리지.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이유가 있겠어? _ p.72 「그림자」
‘재앙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따르면, 모든 재난은 반드시 그것이 벌어질 전조를 알린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전조를 파악해서 재난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데, 그 능력은 대개 선천적으로 부여받지만 후천적으로 취득할 수도 있다고 한다. _ p.80 「재앙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방법」
그녀는 마치 그 시간에 태어났거나 죽을 존재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눈까지 감았다.
그리고 존재 전체의 무게를 하이힐의 높은 굽에 싣고 팽이처럼 좌우로 흔들리며 천천히 중심을 잡았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마천루는 모두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거대한 아날로그시계 하나가 세상의 중심에서 지구를 돌리고 있었다.
천지가 개벽하는 순간 그 사이에 우주 나무 한 그루가 그렇게 서 있었다. _ p.92 「나침반」
충분히 차이를 짐작하시겠지만, 유품이란 유산을 제외한 부스러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들에게 재산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저희에겐 유품이지요.
저희는 유품을 처리합니다.
죽은 자의 몸과 뼈도 유품에 해당합니다. _ p.101 「고독사」
그녀는 죽은 자처럼 사흘을 물 한 모금 넘기지 않고 골방에 박혀 어둠 속에서 잠만 잤다. 그리고 초저녁쯤 깨어나 마치 사흘 만에 갓난아이에서 어른이 된 것처럼, 또는 인간을 파멸시키기로 결정한 것처럼, 주위의 음식을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먹어댔다. 그녀는 먹는 동안 잠을 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꾸준히 화장실을 드나들며 마치 변태를 시작한 뱀처럼 내장을 반복해서 비웠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탈진 상태가 되어 밤을 맞이했다. 그녀는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잠 속으로 들어가 화석이 됐다. _ p.110 「첨단공포」
히틀러를 포함한 모든 독재자들의 주변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 있는데,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동조자가 그것이다. 세 부류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조자들은 대체로 정체가 모호하고 자신의 의견을 거의 말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역사책에서도 그들이 전면으로 나타나는 페이지를 찾을 순 없다. 늘 가해자와 피해자만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며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하지만 정작 모든 역사에서 대부분의 악행을 저지르고 반성 대신 화해를 강요하는 자들이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동조자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너무 익히 알려진 나머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은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 _ pp.119~220 「회수」
낯익은 것들로부터 확실히 멀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내 머릿속에서 남미라는 단어를 발견해냈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그 거대한 고래 한 마리가 머릿속으로 헤엄쳐 들어온 이상 그걸 대체할 수 있는 생각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스스로를 설득할 이유가 명확하지 않더라도 거부할 의사가 없는 이상 계획을 포기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 계획을 지지해줄 동지나 근거를 찾을 목적으로 나는 그 서점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_ pp.107~208 「서치」
호랑이와 흑인 소녀와, 소녀의 스케치북에서 빠져나간 동물들이 어둠 속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다면 굳이 불을 밝혀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왜냐하면 죽음은 대개 진실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우연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_ p.257 「크로키」
그녀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마리 로랑생을 위로했다. 그렇다고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폴리네르를 증오하고 싶진 않았다. 증오는 인과보다 목적이 더 치명적인 법이니까. 대신 그녀는 자신의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센강을 따라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어느 곳에 도착할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_ p.274 「다리」
나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굳게 닫힌 문은 침묵처럼 틈 없이 단단했고 어둠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문을 두드리는 순간 모든 기억이 산산이 부서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문 안쪽이 스스로 밝아지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딱히 그곳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딱히 찾아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젊음은 모든 생각과 행동의 완벽한 알리바이가 됐으므로 몇 차례의 사랑에서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누구의 삶이든지 간에 그것을 짊어지고 걸어간 것은 기묘한 상처들이었고 그것들이 쓰러진 곳에서 잠시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니까. _ p.304 「그녀 앞에서: 카프카의 「법 앞에서」 변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