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청계천! 경성의 한가운데를 동서로 꿰어 흐르는 청계천!
이 청계(淸溪)란 이름이 어떻게 아름다운 것이냐. 그러나 이 이름 좋은 청계천은 청계(淸溪)가 아니요 탁계(濁溪)이다. 오계(汚溪)이다. 검고도 불그스름한 진흙 모래밭 가운데로 더러워진 끄나풀같이 거무충충하게 길게 흘러가는 그 곤탁(?濁)한 물을 보고야 누가 청계라 말하겠느냐?
이름 좋은 청계천은 경성 삼십만 생령(生靈)이 더럽혀놓은 구정물이란 구정물을 다 받아내는 길이다. 약을 대로 약아버린 도회인의 땟국은 다 그리로 흘러 들어간다. 대변, 소변, 생선 썩은 물, 채소 썩은 물, 곡식 썩은 물, 더럽다 하여 사람이 버리는 모든 오예(汚穢)는 다 그리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도 도회인은 이것을 청계천이라 한다. 신경이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도회인은 오히려 청계라 한다. 청계라 부르면서 아무 모순도 부조화도 느끼지 않는다.’라고 중얼대며 영순(英淳)은 청계천의 북쪽 천변을 걸어간다.
때는 첫 봄날 석양이었다. 목멱산과 인왕산 봉우리를 연결한 선의 중간쯤에 걸린 해는 오히려 청계천 북쪽 천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가끔가끔 내 위로 불어 가는 바람에는 겨울의 추위가 아직도 섞이었다. 그러나 천변에 늘어선 집의 벽에 반조(反照)된 광선에는 봄다운 따뜻한 맛이 있다. 이 천변을 왕래하는 사람들은 모두 양지의 따뜻함을 탐함인지, 그늘진 남쪽 천변으로 다니는 사람이 극히 적어 보였다. 참으로 꼭 남쪽 천변에 볼일이 있는 사람이라야만 그쪽으로 다니는 듯하였다. 그리고 내로 향하여 오탁(汚濁)을 흘려버리는 도랑과 수채의 어귀에는 삼동을 두고 얼어붙은 고드름이 아직도 녹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더러운 것이란 더러운 것이 다 흘러 들어가도 그래도 청계이니라 비웃느라고 입을 벌리며 혀를 쑥 내민 것처럼 보였다.
‘옳다! 그래도 청계천이다! 다른 의미에서 청계이다. 장안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서의 청계천이다. 북악, 목멱, 인왕의 골짝과 골짝의 바위틈에서 샘솟아 흘러내릴 때의 물 그것들은 물론 알았다. 이러한 땟국 섞인 물이 아니었다. 바위틈으로 혹은 나무뿌리 밑으로 새어나올 때의 정(淨)한 것은 벌써 얼어버리었다. 경성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얼어버리었다. 그러나 모든 더러운 것을 받아 가지고도 아무 불평도 없이 그대로 흘러간다.’라고 또 중얼댔다. 기울어가는 해는 아무 미련 없이 따뜻한 볕을 한꺼번에 흠씬 주고 가려는 것처럼 호득호득하였다.
영순은 어느덧 관수교에 당도하였다. 다리가 앞에서 바로 뚫려 보이는 창덕궁 돈화문의 주토 (朱土) 빛이 석양의 엷은 광선을 비듬히 받아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먹줄로 퉁긴 듯이 반듯한 신작로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희끗희끗 드문드문 보였다. 그는 다시 북을 향하고, 전차 다니는 종로길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