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덕유산(德裕山)은 남방에 이름 있는 장산(壯山)이다. 송림이 울창하고 골짜기가 깊으며 만학천봉(萬壑千峰)이 엉기어서, 백주에도 해를 우러러 보기가 힘들고 맹수와 독충이 행객을 위협하는 험산이다.
때는 선조대왕 말엽,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 아직도 인심이 안돈되지 않아서, 흉흉한 기분이 남조선 전체를 덮고 있는 때였다.
가을해도 어느덧 봉우리 뒤로 숨어버리고 검푸른 밤의 기분이 이 산골짜기 일대를 덮으려 하는 때였다.
저녁해도 없어지고 바야흐로 밤에 잠기려 하는 이 무인산곡(無人山谷)을 한 젊은 선비가 헤매고 있었다.
길을 잃은 것이 분명하였다. 벌써 단풍든 잡초가 무성하여 눈앞이 보이지 않는 덤불 사이를 땀을 뻘뻘 흘리며 이 선비는 방황하고 있었다.
버석버석, 선비가 발을 옮길 때마다 잡초만 좌우로 쓰러지지 아무리 헤매도 길이 나서지를 않는다. 웬만한 산골 같으면, 하다 못해 적채하는 여인이나 초부들의 외발자욱 길이라도 있으련만, 하도 심산궁곡이라 그런 길조차 없고 잡초만 빽빽하여 눈앞을 가리울 따름이다.
"야단났군 "
연해 연방 탄식을 하며 헤매지만 하늘만 점점 더 어두워갈 뿐이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이 잡히지를 않았다.
이렇게 한참 풀덤불에서 헤매던 선비는 엎친 데 덮친다고 기막힌 일을 당하였다. 이미 날포 어두웠는지라 시랑의 무리라도 나오면 어쩌나 하고 속으로 무한히 근심이 되었는데 요행히 아직껏 시랑의 무리는 만나지 않았지만 어떤 풀줄기를 헤치다가 오른손 무명지를 독사에게 물렸다.
풀을 헤치다가 손가락이 뜨끔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손을 훔치니 서너 뼘쯤 되는 독사가 손에 딸려 올라온다. 그것을 뿌리쳐서 뱀은 떼어버렸지만 듣는 바에 의지하건대 독사에게 물리면 그 손을 잘라내지 않으면 독이 순식간에 전신에 퍼지어서 생명까지 빼앗긴다는 것.
이 무인산중에서 독사에게 물리었으니 이제는 살아 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에?. 하늘도 무심도 하군."
탄식을 지나서 이제는 원망하는 소리였다. 아니, 원망도 지나쳐서, 이제는 절망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때, 원망의 눈이 하늘로 치어들 때에, 선비는 문득, 멀리 명멸하는 불그림자를 발견하였다.
벌써 사위는 캄캄하였는지라, 그 원근은 분명히 알기 힘들되, 건너편 봉우리의 중턱쯤 되는 곳에서 가물가물하는 불그림자를 하나 발견하였다.
뱀의 무서운 독은 벌써 선비의 전신에 뻗쳐 나가는 것이 분명하였다. 손가락만 저리고 아프고 하던 것이 어느덧 팔목까지 저리고, 이제는 팔굽까지 저린 것으로 보아서, 좀 더 뒤에는 팔쭉지까지 저릴 것이며, 그 독은 한 각이 지나지 못하여 온 몸에 다 퍼질 것이다.
선비는 숨을 허덕이었다. 물에 빠진 자는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법이다. 독사에 물린 이상은 손을 잘라내지 않으면 죽을 것이 뻔하였지만, 행여 살 길이 있을까 하여 무턱대고 그 불그림자가 보이는 곳으로 향하여 씨근거리며 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