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손이 사람을 죽였다.
이 주판이나 놓고 편지나 쓰고 하던 맵시나고 아름다운 손이 사람을 죽였다!
전쟁 마당에서 한 병정이 적병 몇 백쯤을 죽였다니기로서니 무엇이 신기하고 무엇이 이상하랴만 이 맵시나는 손으로 잡은 총검이 적인 호주 출신의 영국군의 가슴에 쿡 틀어박혀서 그를 즉사하게 한 것이다.
무슨 은원이 있을 까닭도 없고 무슨 이해관계가 있을 까닭도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 단지 나는 …… 일본군의 한 사람이고, 저는 영국군의 한 사람이라는 인연으로 오늘 내 칼 아래 가련한 죽음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 칼이 만약 10분의 1초만 늦었더라면 그의 칼이 내 가슴에 박혀서 내가 도리어 가련한 죽음을 할 것이 아니었던가.
전쟁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그를 왜 죽였나. 그는 왜 나를 죽이려했는가. 이런 소리는 너무도 평범하다. 다만 검티티하고 태산 같은 호주인이 납함(?喊)을 하며 우리를 향해 습격해오고, 우리 역시 돌격 호령 아래 적진을 향하여 쇄도할 때에…… 무아무중으로 달려간 뿐이지 이 전쟁 이겨야 하겠다든가 져서는 안 된다든가 그런 생각은 할 여지가 없었다.
적과 우리와의 간격이 열 간으로 다섯 간으로 한 간으로 줄어들어가는 순간순간 다만 들리는 것은 폭포 소리 같은 납함뿐이요, 보이는 것은 태산이 내게 부서져 내리는 듯한 적병의 쇄도뿐이었다.
최후의 순간…… 적과 백병전이 벌어지려는 그 순간 내 옆구리에 힘 있게 낀 총검은 적의 가슴을 향하여…….
깜짝 놀랐다.
사람을 죽인다! 사람이 죽는다!
이런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나는 본능적으로 내 옆구리에 꼈던 총검의 방향을 휙 오른편으로 돌렸다. 그러나 시기는 이미 늦었다. 내가 총검의 겨냥 방향을 돌리는 순간, 손과 팔로는 무슨 육둔한 탄력을 감각하였다.
호주병이 내 칼에 찔린 것이었다.
이것을 의식하면서 내 칼을 낚아당기나 방금 나를 향하여 납함하며 달려오던 호주병은 내 칼에 끌려서 앞으로, 땅으로 쓰러지는 것이었다. 다만 멍하니 서버렸다. 이곳이 전장이라는 것도 잊고 방금 나와 한 적병이 단병 접전을 하여 내가 이겼다는 것도 잊고 다만 망연히 서버렸다. 우군이며 적군이며 연하여 내 곁으로 , 혹은 내 앞으로 무엇이라고 부르짖으며 달려간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역시 한 전투원으로 활약해야 할 나는 망연자실하여 내 앞에 쓰러진, 나의 피해자인 호주병만 굽어보고 있었다. 서른 살 안팎의 젊은이였다.
무사히 개선하기를 부모처자가 얼마나 기다리랴. 전장에 내보낸 아들이요 남편이거니, 혹은 죽을지도 모르리라는 각오야 했겠지. 그러나 사람이란 도대체 욕심꾸러기로서 가망 없는 데서도 무슨 회망점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동물이니, 더구나 전쟁이 나가면 꼭 죽는다는 것도 아닌 이상에야 호주병의 친척인들 왜 생환을 꿈꾸지 않았으랴. 그것은 마치 나의 부모가 나의 생환은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거늘 그는 여기서 그가 예상도 안 했을 ‘조선 출신의 학병’인 나의 총검을 받고 즉사하지 않았는가.
호주인인 그는 영국 황제를 위해서 싸웠고, 영국 화제를 위해서 죽은 것이다. 그를 죽인 사람, 나는 일본 황제를 위해서 싸웠고, 지금도 계속해 싸우는 중이다. 목숨이라 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배거늘 전쟁이라는 것은 무엇이길래 내게 이해관계 없는 일에 목숨을 빼앗으며 빼앗기며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