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는 손으로서 평산읍 하(平山邑 下)를 지나로라면 길로 향한 대로변에 서향하여 한 개 묘소가 있는 것을 발견하리라. 그리고 그 묘소에서 한 십여 보 오른손 쪽에 동향하여 또 한 개의 묘소가 있는 것도 능히 볼 수 있으리라.
오래 눈비에 부대끼어 묘비의 명(銘)은 똑똑히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검분하면 서향하여 있는 우하형(禹夏亨)의 묘소라는 것을 알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묘소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은 우하형의 작은 댁의 묘소이다.
어디 있는 어느 무덤이든 간에 그 무덤의 주인의 생전사를 들추어 보자면 몇 토막의 로맨스가 드러나지 않는 자가 없겠지만 이 우하형과 작은댁 새의 로맨스는 모든 로맨스 가운데도 가장 아름답고 순정에 넘치는 자이다.
그러면 그 로맨스는 어떤 것이가. 그것을 어디 한번 상고하여 볼까.
우하형은 武科에 급제하여 관서 방어(關西 防禦)의 임에 있는 사람이었다.
옛날에는 장상(將相)이라 하여 장수와 정승을 동등으로 치고 더우기 대장은 어전에 뵈려면 뵈올 시각을 기다려야 뵐 수가 있었지만 대장은 언제든지 임군께 뵈올 특권까지 가져서 어떤 의미로 보자면 장수의 권한이 정승보다 더 높았다.
그것이 이조시대에 들어서면부터는 유학(儒學)의 세력을 너무도 세워주었기 때문에 차차 문신의 세력이 높아 가고 무신(武臣)은 초라하게 여기는 풍습이 생겼다.
세조대왕이 등극하신 뒤에는 나라이 문약(文弱)해 가는 것을 근심하신 나머지에 무사들을 많이 구하기 위하여 무과(武科) 과거를 끊임없이 보았다. 그리고 활을 잘 쏜다는가 돌팔매를 잘한다든가 힘이 세다든가 싸움을 잘한다는가 한 가지 재간만 가진 사람이면 모두 급제를 시켰다.
그랬는지라 무과에 급제를 하는 사람의 수효는 엉뚱히 많아진 대신에 그 질(質)은 매우 떨어졌다. 머슴살이하다가 급제한 사람 동냥질하다가 급제한 사람 쌈패 노릇 하다가 급제한 사람- 이렇듯 어중이 떠중이가 모두 무과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선비 출신의 문사들은 더욱이 무사들을 멸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