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최서해 | 도서출판 포르투나 | 2020년 10월 22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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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봄날같이 따스하고 털자리같이 푸근한 기분을 주던 이른 겨울 어떤 날 오후이었다. 일주일 전에 우리 집에서 떠나간 어멈의 엽서를 받았다.
이날 오후에 사에서 나오니 문간에 배달부가 금방 뿌리고 간 듯한 편지 석 장이 놓였는데 두 장은 봉서이었고 한 장은 엽서이었다. 봉서 중 한 장은 동경 있는 어떤 친구의 글씨였고 한 장은 내 손을 거쳐서 어떤 친구에게 전하라는 가서(家書)이었다. 나머지 엽서 한 장은 내 눈에 대단히 서투른 글씨였다. 수인란에 ‘경성 화동 백 번지 박춘식씨(京城花洞 百番地朴春植氏)’이라고 내 이름과 주소 쓴 것을 보아서는 내게 온 것이 분명한데 끝이 무딘 모필에 잘 갈지도 않은 수묵을 찍어서 겨우 성자(成字)한 글씨는 보도록 새 서툴었다. 나, 이 순간 묵은 기억을 밟다가 문득 머리를 지나는 어떤 생각에 나로도 알 수 없는 냉소와 같이 엷은 불쾌한 감정을 느끼면서 발신인란을 다시 자세 보았다. 그것은 벌써 일 년이나 끌어 오면서 한달에 한두 장씨 받는 어떤 빚장이의 독촉 엽서 글씨가 지금 이 엽서 글씨와 같이 서투른 솜씨인 까닭이었다.
‘함북 ××읍내 김씨 방 홍성녀(咸北 ××邑內 金氏方洪姓女)’ 이것이 발신인의 주소와 성명이었다. 이것을 본 나는 즉각적으로 그 누구에게서 온 편지인 것을 느끼는 동시에, 이 편지와는 사촌 격도 안 되는 편지를 생각하고 불쾌를 느끼면서 혼자 말초신경 쓰던 것을 내 스스로 입술을 살근히 물면서 찬웃음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 시골 간 어멈이 편지했구려!”
나는 좀 반가운 음성으로 곁에 선 아내를 보면서 뇌고 다시 엽서에 눈을 주었다. 내 손에 쥐인 엽서는 어느새 뒤집히었었다.
“응, 어멈이 편지했소!”
아내의 목소리는 의외의 사람에게서 의외의 반가운 소식이나 받은 듯이 기쁘게 가늘게 떨렸다. 나는 그 말 대답은 하지 않고 편지 사연을 읽었다. 아내도 부드러운 시선을 고요히 편지에 던졌다. 이래서 두 사람의 네 눈은 소리 없이 편지를 읽었다. 사연은 극히 간단하였다.
‘서방님, 기체 안녕하십니까. 아씨도 안녕하신지요. 어린 애기는 소녀가 떠날 때에 몹시 앓더니 지금은 다 나았는지 알고자 합니다. 소녀는 서방님이 지도하신 덕택으로 무사히 와서 잘 있읍니다. 이곳 댁도 다 안녕하십니다. 소녀의 손으로 쓰지 못하는 글이되와 이렇게 문안이 늦었사오니 용서하옵시고 내내 서방님 내외분 기체 안강하옵소서. 끝으로 대단 황송하오나 어린 애기의 병이 어떤지 알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그 사연의 전부이었다 . 역시 무렁 붓에 수묵을 찍어 쓴 서투른 글씨였다. 그것도 잘게 쓰느라고 어떤 자는 획과 획이 어울어져서 ‘사’자인 지 ‘자’자인지 알기 어려운 자도 있었다. 토는 물론 틀린 것이 많았다.
이것을 읽은 내 가슴에는 엷은 애수의 안개 같은 구름이 가볍게 돌았다. 거칠은 겨울이언만 이날은 아침부터 봄같이 따스해서 설면자(雪綿子) 같은 기분이 사람의 혈관을 찌르는 탓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 엽서 한 장이 내게 던지는 기분은 부드럽고 가볍고 불쾌가 없는 엷은 동정의 애수이었다.
그는 나와 무슨 인연이 있었던가? 그는 ‘어멈,’ 나는 ‘상전’으로 이생에서 다만 며칠이나마 부리고 부리지 않으면 안 될 무슨 업원이 전생에 얽히었던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지어 놓고 그에 대한 찬사랄까 그에 대한 허물이랄까를 업원이니 인연이니 하여 전생 후생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를 보낸 뒤에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들은 전부가 어멈의 이야기를 두어 번 하였으나, 그것은 한 지나치는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에게서 편지가 오리라고는 물론 꿈도 꾸지 않았던 바이다. 그렇던 어멈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와 나와 아주 관계를 끊어 버린 오늘까지도 그는 역시 내게 보내는 글을 상전에게 올리는 글이나 마찬가지로 황송스럽게 공손히 썼다, 더구나 어린것의 병을 끝까지 물은 것을 읽을 때 또 읽고 나서 생각하는 때 내 가슴에 피어오르던 엷은 안개는 맑은 물에 떨어진 쌀뜨물같이 점점 무게를 더하여 피부에 스며들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어멈에게 대해서 일종의 동정적 측은한 정을 느꼈다. 호랑이도 제 새끼를 귀엽다면 물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나도 내 아들을 귀여워하고 내 몸을 상전같이 받들어 주는 까닭에 미웁던 어멈이 불시로 고와지고 측은히 여겨지었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이때의 내 심리를 ─중산 계급에서 방황하는 내 심리를 예리한 해부도로써 쪼갠다면 그 속에는 자기 찬사에 대한 기쁨 또는 그 기쁨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찬사 드린 이에게 보내어지는 동정이 다소 있을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지금의 내 맘을 지배하는 바 그 동정, 그 측은은 그의 질소한 성격, 순박한 마음에 대한 그것이요 그 성격이 그 마음, 그 성격과는 아주 반대되는 환경의 거칠은 물결에 찢기고 찢겨서 아름답고 부드러운 그 성격의 올올은 나날이 거칠어 가건만 그것을 의식치 못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믿고 받드는 어린 양 같은 철없는 어멈에 대해서 사람으로서 누구나 가지게 되는 동정이요 측은지심일 것이다. 만일 그와 처지를 같이한 이가 이 모든 것을 보았다면 그에게는 동정과 측은 외에 계급적 의분까지 끓었을 것이다.
“서방님, 안녕히 계십시오!”
그에게 자리를 잡아 주고 차에서 뛰어내리는 내 등뒤에서 마지막 지르는 그의 떨리던 가는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는 것 같다. 그 서투른 글씨조차 순박한 그가 조심조심 쓴 것같이 느껴져서 깨끗한 시골 처녀의 글씨에서 받은 듯한 따뜻하고 부드럽고 경건한 감촉이 내 손가락 끝을 통해서 내 온몸에 미약한 전력같이 퍼지었다.
나는 저녁 연기가 어리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황혼 빛이 내리덮이는 마루에 걸터앉은 채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나간 날의 기억을 한 가지 두 가지 고요한 속에서 뒤졌다.

...책 속에서...

저자소개

일제강점기 「고국」, 「박돌의 죽음」, 「팔개월」 등을 저술한 소설가.

목차소개

<작가에 대해>
갈등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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