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동대문 밖에 나서서 청량리 쪽으로 내려가노라면 안감내 정류장을 못 미쳐서 바로 바른편 길 옆 기단 담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조선식 건물을 볼 것이다. 이 건물은 지금 동방 신문 사장이요 청구 은행장으로 명망과 위세와 재산으로 유명한 한남윤씨의 주택이다. 씨는 본래 문안 필운동 막바지 삼층 양옥에서 살았다. 그런 것이 이태 전부터 씨 스스로도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꼭 지적할 수 없는 병에 붙잡혀서 나날이 여위어 갔다. 삼 년 이른 봄에 어떤 유명한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이 병은 오래 되면 폐와 신경에 큰 관계가 되는 것이니 조용하고 공기가 좋은 데 가셔서 오래 요양하는 것이 대단 좋겠읍니다.”
이렇게 온공하고도 황공스러운 의사의 말을 들은 한남윤씨는 곧 병요양에 적당한 곳을 찾았다. 동래 온천이나 부여 같은 데로 갔으면 물론 좋겠지만 자기의 생명같이 아끼는 황금을 많이많이 펴놓은 서울을 멀리 두고서는 그 걱정에 도리어 병이 될 것이다. 그래 여러 사람과 의논도 하고 많이 생각한 끝에 서울도 가깝고 비교적 공기도 좋고 들도 넓고, 조용한 동대문 밖으로 옮기게 되었다. 요양지를 가린 후에 건축 도안을 꾸미는 데도 문제가 컸다. 양식이 좋다는 이도 있었고 조선식이 좋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씨의 의견을 좇아 조선식으로 지었다.
씨가 이리로 옮겨서 넉달 만에 을축년을 맞았다. 새 집에서 새 봄을 맞는 씨는 만찬회를 열고 여러 사원들을 불렀다.
이 아래 이야기는 금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 밤 이 명예와 권세가 등등한 재산가 한남윤씨의 만찬회 뒤끝에 일어난 활극이다. 나는 조금의 거짓과 꾸밈 없이 그 활극을 적는다.
기쁜 이에게 새로운 기쁨을 주고, 슬픈 이에게 새로운 슬픔을 주고, 바라는 이에게 새 희망을 주는 설날은 어느새 저물었다.
언땅 위에 흐르는 차디찬 공기를 데우던 햇발은 점점 장안 만호의 지붕에서 스러지고 남은 빛이 쌀쌀한 먼 하늘에 불그레 물들이게 되면서는 삼각산 쪽으로 슬슬 내리는 바람을 귀를 에이는 듯하다.
먼하늘 끝에 남은 열붉은 빛은 쌀쌀한 자주빛으로 변했다가 그거나마 흔적없이 사라지면서는 한두 개의 별이 반짝반짝 눈을 떴다. 별들이 하나, 둘, 셋…… 열, 이렇게 늘어갈 때 어디로부터 오늘 줄 모르게 슬근슬근 닥쳐오는 황혼빛은 문안, 문밖에의 집, 산, 들, 숲 할것없이 흐려 버렸다. 솔솔 내리던 바람은 솰솰 소리를 친다.
음력 설. 서울 거리는 고요하다. 종로의 전등은 의구히 켜졌으나 사람의 자취는 드물다. 서로 가지런히 마주 서서 건너다보고, 쳐다보고, 내려다보는 전등들은 바야흐로 닥쳐오는 저리고, 쓰리고, 차디찬 어둠 속에서 스러져 간 낮 자취를 그리는 듯하다. 꿈 같은 그 빛 속으로 간간이 지나가는 것은 미인 태운 인력거, 뚜- 뚜 하는 자동차, 술에 정신이 어리어서 다리를 바로 못 놀리는 패, 진창에서 금방 빠져 나온 돼지같이 허디헌 푸대 조각으로 몸을 싼 거지들이다.
밤이 깊어감을 따라 사면은 더욱 고요하였다. 간간이 즈르렁즈르렁 가고 오는 전차 소리가 고요한 공기에 요란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극히 조용한 때- 바람 소리까지 멀리 스러져 간 때면 어느 술집에선지 흘러나오는 노래 가락은 처량한 정조를 한껏 돋우었다.
밤은 한시가 넘었다.
바람 형세는 깊어가는 밤빛과 같이 더욱 맹렬하였다. 우우하고 고기 비늘같이 잇다은 지붕들을 스쳐서 거리를 지날 때면 누구누구 할것없이 허리를 굽히거나, 머리를 돌리거나,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거나, 흑 느끼고야 만다. 전간목에 기대어 서기도 하고, 어느 점방 현등 아래 가서 서기도 하고, 주정꾼들 뒤를 엉금엉금 따라 가면서,
“나리 돈 한 푼 줍쇼! 으응흥―.” 하는 거지들도 모진 바람이 그 몸을 치는 때면,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어느 집 벽에 가서 붙어 선다.
이때였다.
...책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