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명에서

백신애 | 도서출판 포르투나 | 2020년 11월 17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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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S!
이 어인 까닭일까요!
왜 이다지 고요합니까?
깊고 깊은 동혈의 속과 같이 어지간히도 고요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밤이어요.
마을을 한참 떠난 들 복판에 외로이 서 있는 이 집인 까닭에 이렇게도 고요함일까요.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 아닙니다! 멀리서 달려오는 북쪽의 난폭한 바람이 아 ─ 모 거칠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제 마음대로 이 들판에서 서서 천군만마같이 고함을 치고 이 집의 수많은 유리 창문과 뼈만 남은 나무가지를 마구 쥐여 흔들어 놓아 시끄럽고 요란하기 끝이 없게 할 때입니다.
그런데 왜 이다지 고요할까! 일순간 사이에 땅덩이가 깊은 바다 속에 깔아앉아 버린 듯 합니다. 모든 움직임과 음향이 딱, 정지되어버린 듯도 합니다.
S!
이제 금방 어머니 방에서 어머니가 편안히 잠드시라고 보문품경을 나직나직 읽어드려 겨우 잠이 들으신 듯하여 살며시 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내 방문을 무심코 한 걸음 들어서자 두 눈은 부신 듯 하였어요. 방 안에 얌전스레 나래를 편 듯 깔려있는 침구가 무척도 찬란한 색깔이었든 탓인지요…….
이렇게 호사스런 침구가 나에게 무슨 관계를 가졌단 말입니까! 다만 내가 본래부터 좋아하는 백합화를 하얗게 수놓은 새빨간 자주색 이불일 따름입니다.
머리맡에 놓은 몽롱형 전기 스탠드에는 파란 전구가 끼워져 있고 그 곁에 오늘 신문이 얌전하게 놓였고 작은 둥근 상에는 약병과 물 주전자, 뜨롭통이 담겨 있으며 창에는 빈틈없이 커튼이 내려져 아늑한 방 안의 분위기가 나를 끌어 안어 주는 듯 느껴졌습니다.
대체 누가 내 침방을 이렇게 치장하여 주었을까요. 어느 편을 돌려 보든지 모두가 마음 편히 잘 자도록 정성을 드려 놓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언니가 모르는 사이에 꾸며놓은 것임에 틀림없겠지요.
아침에 내가 이 방을 나갈 때는 신문잡지, 서적 등이 자욱이 널려 있었고, 병원의 입원실같이 하얀 이불이 아랫목에 헝클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언니가 나에게 표하는 정성이 오늘에서 비롯함은 아니나, 왜 그런지 이 밤에는 새삼스럽게 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슴에 찼습니다. 곁에 있었으면 한마디 인사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이제까지는 구태여 언니뿐만이 아니라 집안 사람들 중 누구에게든지 아무런 정성을 받아도 입에 내어 감사다하고 해 본 적이라고는 없었어요.
물론 마음속까지 느낄 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입 밖에까지 내여 표현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무뚝뚝한 성격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나의 성격이라고만 돌리고 말 수는 없어요. 왜그러냐 하면 나는 그들에게 감사를 느끼기 바로 직전의 순간에는 마치 무거운 쇠줄에 동여 매이는 것 같은 압박을 느끼는 것이었어요. 아니 그 보다도 도리어 나는 괴롬을 느끼는 것이랍니다. 그들에게 무엇 하나라도 보람될 것이라고는 가지지 못한 나이기 때문에……. 아니 항상, 그렇습니다. 항상 나는 그들이 나에게 바라고 있는 바를 기어이 배반하여 버리려고, 아니 배반하고 말리라, 배반하여 버리지 않고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악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성은 나에게 고통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바는 오로지 압박천대, 그리고 축출! 이것이어요.
그러면 나는 얼마나 마음이 자유롭고 얼마나 용감해질 수 있으리.
그들의 지극한 은애(恩愛)는 나에게서 용기와 자유를 고살(苦殺)시킬 뿐입니다.

저자소개

소설가(1908~1939). 본명은 무잠(武岑). 1929년 단편 소설 <나의 어머니>로 문단에 데뷔한 여성으로, 현실주의적 작품들을 발표했다. 작품에 <꺼래이>, <적빈(赤貧)>, <호도(糊塗)> 등이 있다.

목차소개

<저자에 대해>
1. 귀먹은 자(者)의 정적(靜寂)에서 외우는 독백(獨白)
2. 천국(天國)에 가는 편지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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