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갛게 깍은 머리 위에 탕건만 눌러 쓰고 활짝 돋운 남포불을 바라보며 김상렬(金相烈) 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건넌방에서는 아이들의 장난하는 소리가 부산하였다.
‘오늘밤만 새면 내일부터는 또 한 해가 시작된다’하고 그는 빨뿌리에 마꼬 한 개를 끼워 들고 생각에 잠기었다.
‘좌우간 오늘밤 안에 작정을 단단히 해 가지고 내일부터는 근심이 없도록 해 버려야지, 차일피일 하다는 큰일이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은 부자집이라고 모두 부러워하나 실상 김상렬 자신은 기막힐 딱한 걱정이 두 가지 있었다. 그는 이 걱정거리를 없애기 위하여 오래 고민하여 왔으나 좌우 판단을 내기에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잘 깨달았던 것이다.
하나는 자기의 뒤를 이을 맏아들에 관한 일이요, 또 하나는 자기의 전재산에 관한 일이니만큼 지금의 김상렬에게는 자기 생명 다음 가는 중대한 걱정거리다. 그는 이 두 가지를 생각할 때마다
‘지금 세상은 예전 세상과 다르다. 예전에는 천벌이 무서워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지마는 지금은 천벌이란 것이 없어졌다.
톱으로 썰어 죽이고 벼락을 때려 가루를 내어 죽여도 죄는 죄대로 남을 용덕이란 놈은 아직껏 네 활개 펴고 잘 살게만 해 두고, 그렇게 순직하고 무지런하던 김서방은 재작년 여름에 벼락을 맞아 죽었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천벌이란 정말 엉터리없는 것으로 타락되고만 것임을 알 수가 있단 말인지.
그리고 이 땅덩어리로 말하더라도 옛적에는 부동여산(不動如山)이니 태산같이 믿는다느니 하여 대지를 변함도 움직임도 없는 절대의 것으로 믿고 둘 곳 없는 심사라도 오직 이 땅 위에만은 맘 턱 놓고 발을 내려 디디던 것이었으나 지금은 어디 땅이 흔들린다는 둥, 어느 곳 땅이 벌어지고 사람이 죽는다고 법석이란 둥, 아무 산이 터지며 불꽃이 충전한다는 둥 하니 이런 기막힐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믿은 땅덩어리가 움직이니, 항상 움직이며 살아가는 사람이야 일러 무엇하랴. 변화무궁하고 교묘(巧妙) 교활(狡猾)하며 심지어 선악의 표준까지 혼돈케 되어 구별할 길이 없으니 나는 어느 것을 절대적 옳은 것으로 믿을 수가 없고, 이 가운데서 살아가기 정말 두렵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라도 절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도 ‘내 편을 만들고 내 수중에서 녹여 낼 수 있는 대로만 하는 것이 절대로 착한 일이며 절대로 옳은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김상렬이가 이같이 믿을 수 없다는 세상에서 오직 한 가지 믿을 수 있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법률이다. 이 법률이란 것이 어떻게 생겨났던 것인지 또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 하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법률이란 것을 알게 되던 때(물론 육법전서를 다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법률이란 것이 있다는 것만을 알게 된 때에 말이다) 너무 기뻐 하늘이 무심치 않음을 감사하였던 것이다.
‘천벌이 영험(靈驗) 없게 된 것도 하늘의 옥제(玉帝)가 이 땅 위에 당신이 택하신 임금님을 내리시사 법률이란 것을 만들게 하셔 간접으로 정사(政事)를 하시게 된 것이리라’고 무한히 기뻐하였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법률에 눈이 밝다는 자기와 각별히 친한 친구 이정환을 자주 만나서 온갖 법률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한 가지 괴로움이 생겨났다. 그것은 자기 아들에 관한 일이었다.
물론 아들이 못나서 하는 걱정이 아니라 그대로 남에게 뒤지지 않을만은 하지만 장가를 잘못 보낸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