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온지 다섯달, 상동(尙童)은 인제 겨우 서울 길 골목 골목을 대충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몸에 조금만 틈이 생기면 행길에 나가서 제기도 차고 택견도 하고 동네 양반의 댁 수청방에 들어가서 장기도 두고 제법 둘만큼 되었다.
충청도에서 처음 괴나리 봇짐을 등에 지고 거치장스런 머리꽁뎅이를 수건삼아 머리에 틀어얹고 숭례문을 들어선 때는 나이도 열네살에 어린 총각이었지마는 처음보는 서울에 얼이 빠지고 겁이 나서, 회동(會同) 정한림(鄭翰林)의 상노로 들어 간 후로는 상전의 심부름이 아니고는 큰 길에 나서지도 못하는 어리배기었다.
이름 좋은 한 울타리로 명색은 상노지마는 상전의 요강망태기를 들고 보교 뒤를 따라가는 구실도 못하였다. 그래서 안으로 사랑으로 드나들며 군불 때기나 하고 물이나 길어대는 불목한이나 다름없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년이 지나 열다섯 살이 되고 보니 어제 올챙이가 오늘 개구리란 셈으로 어느 결에 서울물에 젖어서 탈골치 메투리도 제법 엎어 신을 줄도 알게 되고 가마채를 붙들고 한 손으로 바람을 차고 가는 남의 집 계집애 종의 맵시 평도 하게 되었다.
그 중에도 한 가지 여느 상노들과 특이한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글을 제법 아는 점이었다.
상동이는 시골서 홀어머니의 덕으로 글방에를 다녔다 가난하게 지나기는 했어도 뼈가 상언이 아니어서 글방에 다녀도 비실거릴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정신이 일남촉기라서 한번 배운 글은 다시 공부를 아니해도 이튿날 강에는 막혀본 적이 없었다.
글씨를 쓰면 언제든지 관주 투성이었다.
천자, 동몽선습, 소학, 맹자, 그리고 통감 이렇게 다 떼고 논어를 읽기 시작할 때 집안의 형편은 상동으로 하여금 고향에 있지 못하게 하였다.
누구라 있지 말라는 것은 아니로되 어머니는 어린 상동이를 앞에 앉히고
『너를 슬하에 두고 키우자고 하였더니 집안의 형편이 말이 못되서 어머니는 창피하지마는 남의 집 침모라도 들어갈 터이니 너는 서울 가서 어떻게 굴든지 출세를 해 보아라.』
하고 눈물 섞인 훈유를 하였다.
『어머니 왜 집안이 이렇게 되었소?』
하고 묻는 말에 어머니는 쾌한 대답을 아니 해주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의 말을 들건대 모자가 연명해 오던 땅을 외삼촌 되는 이가 속여 팔아 가지고는 어디로 갔는지 영영 도주해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유일의 수입으로 지내오던 집안이 별안간 몰락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