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비 경호는 어느새 고개를 넘어가고 보이지 않는다.
경순은 바람이 치일세라 겹겹이 뭉뚱그린 어린것을 벅차게 앞으로 안고 허덕지덕, 느슨해진 소복치마 뒷자락을 치렁거리면서, 고개 마루턱까지 겨우 올라선다.
산이라기보다도 나차막한 구릉(丘陵)이요, 경사가 완만하여 별로 험한 길이랄 것도 없다. 그런 것을, 이다지 힘이 드는고 하면, 산후라야 벌써 일곱 달인 걸 여태 몸이 소성되지 않았을 리는 없고, 혹시 남편의 그 참변을 만났을 제 그때에 원기가 축가고 만 것이나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아무리 애석한 소년 죽음일값에, 가령 병이 들어 한동안 신고를 하든지 했다면야 주위의 사람도 최악의 경우를, 신경의 단련이라고 할까 여유라고 할까, 아뭏든 일시에 큰 격동을 받지 않고 종용자약하게 임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이는 전연 상상도 못할 불의지변이어서, 무심코 앉았다가 별안간 당한 일이고 보니 사망(死亡) 그것에 대한 애통은 다음에 할 말이요, 먼저 심장이 받은 생리적 타격이 대단했던 것이다.
쇠뿔을 바로잡다가 본즉 소가(죽은 게 아니라) 말승냥이가 되더라는 둥, 불합리의 간접교사를 하고 있을 수가 없다는 둥, 언뜻 암호문자(暗號文字)처럼 생긴 이유를 찾아가지고, 남편 종택이 제법 그때는 녹록치 않은 소장논객으로서 어떤 잡지의 전임 필자이던 직책을 내던진 후, 집안에 칩거한 것이 작년 이월 초생……
잡지사를 그만둔 이유는 그러한 것이었으나, 그를 단행한 직접 동기는 고향의 부친에게서 온 한 장의 서신이었었다.
아침에 마악 잡지사에 출근을 하려는 참인데 편지가 배달이 되었다. 이맛살을 잔뜩 찡그리고 읽어 내려가던 종택은 귀인성 없는 늙은이들, 죽지도 않는다고, 불측한 소리를 두런거리면서 방바닥에다 편지를 내동댕이치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그 손으로 잡지사에 사직원을 쓰던 것이다.
잡지사의 사직이야 시일 문제인 줄 경순도 알기는 알던 터이지만, 시아버지의 편지가 그와 무슨 관련이 있을 줄은 뜻밖이라 궁금한 대로 편지를 걷어가지고 읽어보니, 강진사의 예의 한문에 토를 달아 가면서(아들이 순한문은 잘 몰라본대서 언제고 그 투다) 한 발이 넘게 달필의 붓글씨로 휘갈린 사연이 우습기도 하고 솔직하기도 하나, 결국 함축 있는 반박이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