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1945년) 초가을이었소.
소위 ‘적당한 시기에 한국인에게 독립을 허여한다’는 카이로와 포츠담의 결의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을 ‘우리 땅에서의 일본인의 전퇴’쯤으로 해석하고 ‘일본의 항복’과 ‘연합군의 조선 진주’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환영하던 그 무렵이었소.
전쟁 통에 소위 ‘소개’라 하여 16년간 살던 집을 없이하고, 공중에 떠있던 나와 나의 가족들은, 이 기꺼운 시절에, 몸 의탁할 근거(주택)를 마련하느라고 쩔쩔매고 돌아갔었소. 가뜩이나 주택난에 허덕이는 경성 시내에서, 더욱이 독립한 내 나라를 찾아 돌아오는 많은 귀환인이며 전쟁에 밀려서 시골에 내려갔다가 도로 서울로 돌아오는 사람들이며, 독립한 내 나라 수도를 사모하여 몰려드는 무리며 등등으로, 서울의 주택난은 과연 극도에 달하여 있었소.
이러한 비상한 시절에, 집을 구하려 하니 좀체의 일이 아니었소. 돈이나 넉넉하면 그래도 돈의 위력으로 우겨볼 것이요 무슨 다른 튼튼한 배경이라도 가졌으면 배경의 힘으로라도 운동해보련만, 아무 배경이며 힘을 못 가진 가난한 소설가로, 곁눈질도 하지 않고 단 한길을 47년간 걸어온 나는, 손톱눈만한 협력을 바랄 길도 없이, 흥분과 혼란으로 웅성거리는 이 도시에서 주택 한 채를 구해보려고 돌아갔었소.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날이 주택 문제는 긴박의 도수를 더해가며, 집은 좀체 손안에 들어오지 않고, 엄동은 차차 가까워오고…… 가족 일곱 명의 가장으로서, 가족의 몸을 눕힐 안주처를 못 마련한 나의 책임은 여간 급하고 무겁지 않았소.
8월 보름에서 9월로 10월로, 11월로 엄동은 목전에 임박했는데, 주택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과연 딱하고 급하였소. 이제 수일 내로 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비상한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 그 비상한 수단이란, 즉 가족의 이산이오. 가정이라는 한 집 단체를 헤치고,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아이들을 나누어 맡아가지고, 각각 여관이나 하숙이나 셋방이나를 얻어가지고, 헤어져서 사는 것. 주택이 없으매 가정을 이룩할 수 없고, 가정이 없으매,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이오.
이렇게 되면 과연 크나큰 비극이오. 나라가 해방되었다고 서울로 돌아와보니, 내 나라 서울은 내 가족 하나를 포옹할 수가 없는가.
46년의 전생을 아무 야심도 없이 허심탄회 오직 소설도에만 정진해왔고, 지금 천하가 모두 정치적 야망이거나 매명적 야망이거나 모리적 야망에 뒤끓는 판국에서도 그런 데서는 멀리 떠나서 다만 내 가족이 몸을 쉬고 또는 조용히 앉아서 글 쓸 만한 집 한 채를 구하고자 하는, 말하자면 지극히 담박한 욕망이거늘, 이 욕망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사정이 진실로 딱하고 한심스러웠소.
시절도 인젠 엄동이 들어섰고, 집은 마련하지 못하고 하릴없이 가족 이산의 비극적 각오를 한 그때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