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전(月前)에는 왕(百濟王―義慈)이 몸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신라를 침략하여 이 나라(新羅)의 사십여 성을 빼앗았다. 그 놀란 가슴이 내려앉기도 전에, 팔월에 들면서 백제는 또 장군 윤충(允忠)을 시켜서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쳐들어온다는 놀라운 소식이 계림(鷄林)의 천지를 또다시 들썩하게 하였다.
이 소식이 들어오자 꼬리를 이어서 따라 들어오는 소식은 가로되, “대야성은 함락되었다. 대야성 도독 김품석(金品釋) 이하는 모두 죽었다.” 하는 놀랍고도 참담한 소식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 그 상보(詳報)가 이르렀다. 그 상보에 의지하건대, 대야성이 백제 장군 윤충의 군사에게 포위되자, 대야성 성내에서는 반역자의 분란이 일어났다. 대야성 도독 김품석의 막하에 점일(點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점일에게는 젊고 아리따운 안해가 있었다. 도독 김품석은 자기의 지위를 이용하여 점일의 안해를 빼앗았다. 이 때문에 도독에게 원심을 품고 있던 점일은, 백제의 정벌군이 이르자 안해 빼앗긴 분풀이로, 제 나라를 배반하고 백제군에게 내응하여, 성내의 각 창고를 불 놓으며 성내에서 난을 일으켰다. 그러지 않아도 백제의 강병을 도저히 대적치 못하겠거늘 성내에 반역 분자까지 생기고 보니, 인제는 대야성은 더 볼 나위가 없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매 김품석의 막하에 서천(西川)이라는 사람이 성에 올라가서 적장 윤충에게
“내 목숨만 거두어 주신다면 성을 들어 항복케 하오리다.”
고 굴복할 뜻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윤충에게서,
“온 성이 항복을 하면 생명은 보전해 주마.”
는 대답을 얻은 서천은 도독 김품석에게 그 뜻을 전하여 동의를 얻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그 뜻으로 권고를 하여 동의케 하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 죽죽(竹竹)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 어머니가 내 이름을 죽죽이라고 지어 주신 것은, 꺾어질지언정 굴하지 말라신 뜻인데, 내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적에게 굴하랴.”
하며 동지를 모아가지고 끝끝내 항전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