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과 좌우로는 변두리가 까마아득하게 퍼져나간 넓은 들이, 이편짝 한 귀퉁이가 나지막한 두 자리의 야산(野山) 틈사구니로 해서 동네를 바라보고 홀쪽하니 졸아 들어온다. 들어오다가 뾰족한 끝이 일변 빗밋한 구릉(丘陵)을 타고 내려앉은 동네. ‘쇠멀’이라고 백 호 남짓한 농막들이 옴닥옴닥 박힌 촌 동네와 맞닿기 전에 두어 마장쯤서 논 가운데로 정자 나무가 오똑 한 그루.
먼빛으로는 조그마하니, 마치 들 복판에다가 박쥐우산을 펴서 거꾸로 꽂아놓은 것처럼 동글 다북한 게 그림 같아 아담해보이기도 하지만, 정작은 두 아름이 넘은 늙은 팽나무다.
멍석을 서너 잎은 폄직하게 두릿 평평한 봉분이 사람의 정강이 하나 폭은 논바닥에서 솟았고, 저편 가로다가 울퉁울퉁 닳아빠진 옷뿌렁구를 드러내놓고서, 정자나무는 비스듬히 박혀 있다.
봉분에서 이리저리 뻗어나간 논틀길을 서너 갈래, 그중 동네로 난 놈이 유독 넓기도 하고 꽤 길이 난 것은, 동네와 이 정자나무 밑과의 왕래가 빈번하다는 표적을 드러냄이다.
봉분 둘레로는 나무에서 떨어져내린 앞이야 부러져내린 삭정개비야, 봉분에서 쓸려 내려간 검부작이야 흙부스러기야 또 어른 아이 없이 무심코 빗디딘 발자죽이야, 그런데다가 육장 그늘까지 덮이고 해서, 도통치면 한 마지기는 실히 되게시리 논의 벼농사를 잡쳐놓았다.
나무가 생김새가 운치도 없고, 또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을 요긴해할 활량도 없고 한데, 더구나 그렇듯 농사를 잡쳐놓기까지 하니, 벼 한 포기라도 행여 치일세라 새뤄하는 촌사람들에게야(가령 논 그 농사가 제 가끔 제 것이 아니라도) 이 정자나무가 그다지 귀인성 있는 영감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