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어젯밤보다도 더 추워졌으나 바람은 불지 않았다.
울 밖의 밭 가운데 섰는 전신주를 타고 들로 건너간 전신선이 바람에 부딪쳐 쩡 차갑게 우는 소리도, 그래서 오늘 밤은 들리지 않고 밤만 죽은 듯 괴괴하다.
불은 여전히 깡통으로 만든 대추씨만한 석유등잔불이고.
그 알량한 불을 한가운데 놓고 오늘 저녁에도 세 조손(祖孫)은 각기 일감을 가지고 둘러앉았다.
할머니(총기 좋은 할머니)는 아랫목으로 벽에 기대어 벗은 두 발을 포개 뻗고 앉아서 오늘 저녁은 버선을 깁는 것이 아니라 정다산(丁茶山)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읽고 있다.
손자며느리 정옥은 커다란 남자 저고리에다 솜을 하마 이불만큼 두껍게 두고 있다.
열네살박이 막내손자 대희는 어제 저녁처럼 등잔불 한옆으로 배를 깔고 엎드려 공부를 하고 있고.
손자며느리 정옥의 소생인 증손자 종수, 상수 두 놈은 역시 어제 저녁처럼 여기저기 제멋대로 나가떨어져 한잠이 들었고.
한동안 잠심하여 책을 읽고 있던 할머니가 별안간 호호, 이빨 하나도 없는 잇념으로 혼자 웃으면서 책 든 손을 내린다.
“무어유, 할머니!”
대희가 고개를 들고 저도 건성으로 웃으면서 묻는다.
“옛날 어떤 관인(官人)이, 아마 어느 고을 원님였던 게지. 도독놈을 하나 붙잡어다 문초를 했드란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책을 도로 들고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새겨가며 이야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