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가 듣는 듯 그늘 짙은 뒷마루에서 업순이는 바느질이 자지러졌다.
(음력으로 칠월) 한여름의 한낮은 늘어지게 길다. 조용하고, 이웃들도 졸음이 오게 짝 소리 없다.
뒤 섶울타리를 소담스럽게 덮은 호박덩굴 위로 쨍쨍한 불볕이 내리쬔다.
오래 가물기도 했지만, 더위에 시달려 호박잎들이 너울을 쓴다.
손 가까운 데 두고 풋고추도 따먹을 겸 화초삼아 여남은 포기나 심은 고춧대들도 가지가 배애배 꼬였다. 그래도 갓난아기 고추자지 같은 고추가 담숭담숭 열리기는 했다.
울타리 밑에서는 장닭이 암탉을 두 마리 데리고, 덥지도 않은지 메를 헤적이면서 가만가만 쏭알거린다.
키만 훨씬 크지 가지나 잎은 앓고 난 머리같이 엉성한 배나무가 저처럼 엉성한 그늘을 장독대 옆으로 던지고 섰다. 까치가 한 마리 끼약끼약 짖다가 심심한지 이내 날아가버린다.
마주 환히 열어놓은 방 앞뒷문으로 소리없이 드나드는 바람이 소곳이 숙인 업순이의 이마 위로 서너 낱 드리운 머리칼을 건드리곤 한다.
한가운데로 탄 가리마가 새하얗게 그린 그림 같다. 조금 뒤로 젖혀진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배어올랐다. 살결 희고 도도록한 볼때기가 귀밑께로 가면 배내털이 아직 부얼부얼하다.
업순이는 깜박 졸음이 오려고 하는 것을 참고 손을 재게 놀린다. 뻣뻣하고 커다란 아버지의 삼베적삼이 업순이의 조그마한 손과 굵다란 바늘 끝에서 솜같이 보드랍게 논다.
아닌게아니라, 업순이는 시방 정신은 딴 데 가 있으면서 보드라운 비단을 만지고 있다.
깨끗하고 정하게 생긴 하얀 비단, 눈이 부신 진자주 비단, 시원스러워 보이는 남색 비단, 하늘거리는 연분홍 비단, 첫봄 머리의 개나리꽃 같이 반가운 노랑 비단, 이런 여러 가지 비단들이 피륙으로 혹은 말라놓은 옷감으로 드리없이 손에 만져지는 것이다.
그저께 아침, 일이 다 그렇게 작정이 되어, 그 이야기를 어머니 아버지한테 듣던 때부터 업순이는 무시로 이렇게 비단 만지는 꿈 아닌 꿈을 꾸곤 했다.
그러고, 그런 때면 으례껀 저도 모르게 방긋이 웃음이 떠오르곤 한다.
처음 겸 마지막으로 딸 하나를 낳았더니, 생긴 게 또 복슬복슬하대서 어머니 아버지는 삼신님이 업을 점지해 주셨다고, 그래 업순이라고 이름을 지었었다.
업순이는 시방 나이 열일곱, 그러니 옛날 세상 같으면 벌써 시집을 같을 테고, 잘하면 지금쯤 첫아기라도 하나 낳았을 테지만, 아직 귀영머리를 땋은 채 처자다. 그렇다고 어머니 아버지가 무슨 투철한 개화를 한 것도 아니요, 갈데없는 무식꾼하고 농투성이기는 하지만, 일찌감치 남의 집 민며느리라도 주자니, 무남독녀 외딸인 걸 그러기가 아깝기도 하려니와, 또 남의 집 민며느리란 팔자가 빠안히 들여다보이는 것인데, 그걸 눈 멀뚱멀뚱 뜨고서 그 고생줄로 몰아넣기도 애처롭고 해서 차마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러구저러구 할 게 아니라 어미 아비는 개명을 못했을망정 시쳇속으로 어디 네나 개명을 좀 해보라고 집안 사세도 부치는 것을 억지삼아 읍내 보통학교에 들여보내서, 학교 공부(普通學校[보통학교] 卒業[졸업])를 시켜보았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학교 공부를 시켜놓고 보아도 별 두드러진 수는 없고, 종시 촌 농투성이의 계집애 자식이지 별것이 아니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