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고, 시간의 역사인
두 번째 소설집 『봄의 신부』는 無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 존재와 부재의 공통어를 찾다가 無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無는 없음을 뜻하고, 완벽하게 비어 있는 상태의 0을 말함이 아닌가. 그리스에서 시작된 0의 기원은 없는 것을 나타내려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0은 신의 언어이며, 없다고 말하는 순간 있는 것이 되고 마는 숫자였다. 없다고도 있다고도 단정하기 어려운 죽음처럼. 그 기호 속에 인간의 역사가 숨 쉬고 있다.
‘죽음’이란 화두가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 예고 없이 닥치는 불행 앞에 우리는 얼마나 속수무책이었던가. 천안함 사고와 대구지하철화재참사를 비롯한 사회적 참사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아파하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좀 늦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대구지하철화재참사와 천안함 사고를 소설에 담아서 세상에 내보낸다. 대구지하철화재참사를 소설에 담기까지 1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장편소설도 아닌 경장편소설 한 편 쓰는 게 그리도 힘들었을까? 필력이 부족한 탓임을 알고도 그 소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내 고향 사람들의 얘기여서 더 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죽음이 무엇인지.
無에서 생성된 개체가 긴 생애를 거쳐 마침내 발현이 시작되는 곳에 이르게 되는 그것, 영원회귀. 삶의 도정에서, 혹은 완성되는 극점에서 맞게 되는 그 본성으로의 회귀는 인간의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하다.
『봄의 신부』는 불현듯 세상을 떠나야 했던 이들을 위한 레퀴엠Requiem이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1호선에서 홀연히 사라진 192명의 희생자들과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사고로 세상을 떠난 46명의 젊은 영령들에게 드리는 진혼곡이자 숭고한 미사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 눈물로 얼룩진 잔인한 봄이었다. 더 잘 쓰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글을 쓰며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이제라도 편안히 잠드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I am….’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17년이 지났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다 갔는지, 시간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비어 있는 그들의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린 숫자 0과 영원회귀라는 숙제가 남아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만든 순간의 응축 그 영원 속에 인간의 삶이 존재한다. 영원 속으로 사라진 그들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이, 공허한 울림으로 흐려지지 않기를….
2020년 여름에
이곡동 작업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