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운명

채만식 | 도서출판 포르투나 | 2021년 06월 07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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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오늘은 자리가 바뀌었다.
할머니(총기 좋은 할머니)가, 한 동네에 있는 둘쨋집에 온 것이었다.
할머니의 세 아들, 윤석(允錫), 승석(承錫), 중석(重錫)의 삼형제 가운데, 기미년(己未年) 삼일운동 적에 죽은 그 둘째아들 승석의 집이었다.
승석의 집이라고 하지만, 물론 대주(大主) 승석은 이미 죽어 없고, 유족으로 그의 부인 강씨(康氏)가 아들 원희(元熙)를 데리고, 따로이 한집(戶口[호구])을 이루고 사는 집이었다.
승석의 둘쨋집, 중석의 세쨋집과 더불어, 맏이 윤석, 멀리 경술년(庚戌年) 합방 후 의병에 투신을 하였다가, 다시 해외로 나가 광복운동을 하다 노령(露領)으로 간 뒤로 이내 소식이 없어, 필연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그 윤석의 집도 같이 이 동네에 있었다. 윤석의 부인 고씨(高氏)가, 그 몸에서는 소생이 없어, 셋째 중석에게서 난 성희(成熙)를 양자로 들여, 같은 한 동네에서 역시 따로이 한 집(戶口[호구])을 이루었던 것이었었다.
큰집, 둘쨋집, 세쨋집이 그래서 다 이 동네, 한 동네에 있었다.
할머니는 늘, 둘쨋집에도 가서 며칠씩 있다, 큰집에도 가서 며칠씩 있다,
세쨋집으로 와서 한동안씩 있다 하면서, 어린 증손자들의 재롱도 보고, 장성한 손자들이 제각기 제 앞을 가려 가며 사는 양을 흡족하여 하기도 하고, 더러는 어느덧 흰머리가 성성한 며느리들과 함께 파란 많고 한(恨) 많던 과거를 회상하며 하염없어하기도 하고 하는 것으로 낙과 소일을 삼았다.
날씨는 한 이틀 춥는 체하더니, 오늘 아침부터 도로 풀리어, 해동머리의 봄날같이 푹하였다.
부엌에서는 할머니한테 대접할 밤참으로 시루떡을 찌느라고 컴컴한 부엌에서 아궁이의 장작불이 황황 타고 있다.
이 집의 젊은 주부요 원희의 아낙인 김씨(金氏)가 떡시루의 소댕을 얼고 긴 창칼로 여기저기 떡을 찔러본다. 부연 김이 솟아 부엌으로 가득 잠기고, 호박시루떡이 익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긴다.
칼 끝에는 아직도 날가루가 묻어나와 김씨는 소댕을 덮고 불을 더 싸게 지핀다. 옥녀─원희 내외가 고아를 거두어 기르는 수양딸이, 옆에서 같이 일한다. 여기도 불은 매양 깡통으로 만든 석유등잔불이다.
그 대추씨만한 등잔불을 등판에 받쳐놓고, 할머니와 며느리와 손자 원희가 둘러앉았다.
할머니는 어디 가서나 마찬가지로, 아랫목 벽에 기대어 발 벗은 두 다리를 포개 뻗고 편안히 앉았다.
아랫목 뒤 곁으로, 이불을 올려논 반닫이가 있고, 그 앞으로 며느리 강씨가 앉아 긴 담뱃대에 담배를 피운다.
아무리 같이 늙어가는 고부(姑婦)끼리라고는 하여도, 며느리로 앉아 시어머니 앞에서 장죽에 담배를 피우다니, 속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자못 어색하고, 체수 아닌 풍속이었다.
강씨가 나이 적은 남편 승석보다 한 살 더한 신묘생(辛卯生) 쉰여덟이요, 시어머니 되는 할머니가 일흔여덟이니, 같이 늙는다고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며느리가 시어머니 앞에서 긴 담뱃대 꼿꼿이 물고 앉았다는 것은 예사 가풍(家風)은 아니었다.
일찍이 기미년에 둘째아들 승석이 죽고, 그의 아낙 강씨가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자, 시어머니인 할머니는, 이 며느리에게 일부러 담배를 가르쳤다.
나도 갑오 을미년(甲午乙未年)에 너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스물다섯 살의 새파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이 날까지 살아왔다마는, 늙으나 젊으나 과부한테는 담배밖에 만만하고도 좋은 벗이 없느니라. 가슴 울적할 때, 마음 싱숭거릴 때, 외로울 때, 슬플 때, 밤잠 아니 올 때,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앉았느라면, 저으기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는걸……
너도 담배나 배워라. 그리고 내 앞이라고 어려워하지 말고 나 보는 데서 먹어라.
담배라는 것이 본시부터 우리 조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인즉은 임진왜란 적에 왜사람의 손으로 들어왔다고 하느니라. 그래서 담배를 가지고 상하를 가리는 것도 중년에 도학샌님들이 마련해낸 노릇이지, 근본에 있던 예법은 아니더란다. 워너니, 듣자면 술 담배를 가지고 상하를 가리는 풍습은 동양 삼국에서도 유독 조선뿐이라더구나. 서양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본 사람이나 청국 사람들은 부자(父子) 대작(對酌)을 하고, 같이 앉아 맞담배질도 하고 한다더라. 술 담배도 음식일 바이면, 음식을 가지고 어른의 앞에서는 먹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애당초에 예법하고는 우스운 예법이지.
남이 무어라는 게 무슨 상관이냐. 코 벤 수치(羞恥) 아니고. 아무 걱정 말고서 담배 먹어라.
이러면서, 마침 장만하여 두었던 곰방담뱃대에 담배 서랍과 담배까지 내주었다.
그 날부터 강씨는 담배를 배웠고, 시어머니인 할머니의 앞에서 담배를 먹고 하였다.
남편 윤석이 경술년에 해외로 나가고 없어, 그때부터 벌써 과부나 진배없게 지내는 맏며느리 고씨가, 그것을 보고 부러워하다가, 동서(同媤) 강씨를 시켜, 시어머니한테 청을 넣은 것이, 그러다뿐이겠느냐고, 선뜻 허락이 나 고씨가 또한 담배를 배워, 시어머니 앞에서 담배를 먹게 되었다.
손윗 두 동서가 그러는 바람에 막내 중석의 아낙 윤씨는, 운덤에 담배를 배웠고, 어름어름하다 보니 어느 겨를에 시어머니 앞에서 담배를 먹고 앉았는 며느리가 되어버렸었다.
할머니는 삼사 년 후에 어지럽다고 담배를 폐하였지만, 세 집이 분가를 하기 전, 같이 한 집에서 살고 있을 때에는 그래서 네 고부(四姑婦)가 어떡하다 한 방에 모이든지 하면, 제각기 길고 짧은 담뱃대를 물고 둘러앉았는 광경이란, 한바탕 기물스런 것이 있었다.
강씨는 일지감치 스물아홉에 남편의 참변을 보았다는 것이었고, 여의치 못한 환경에서 여러 어린 자녀를 양육하기에 고초를 겪었고, 그리고 이 집은 생업(生業 : 職業[직업])이 주장 농업인지라, 사철 농사일에 몸이 고되고 하기 때문에, 세 동서 가운데 제일 고생이 많고, 따라서 늙기도 제일 일찍 늙고 하였다.
얼굴에는 굵고 잔주름이 가로 세로 패이고, 머리는 하마 시어머니인 할머니만치나 세었다. 손이 북두갈고리 같다.
얼굴 바탕은 그러나 늙고 바스러지기는 하였어도, 모진 데가 없고 두릿하니 퍽 후덕하여 보이는 얼굴이다.
이 모친 강씨의 얼굴을 그대로 그려논 것이, 문앞 바로 중처럼 회색물 들인 솜바지 저고리를 푸석하니 입고 앉았는 맏아들 원희다.
사철 햇볕과 비와 바람 속에서 흙을 주무르며 사는 사람이라, 살결은 늙은 바위처럼 검고 거치나, 너부릇한 얼굴이며 유순하디유순한 눈이 지극히 마음씨 착하고 원만스러 보인다.
1932년 무렵에 전주 농업학교를 마치고, 한 삼 년 농사시험장의 기수(技手)를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 이래 십오 년 착실한 농민으로써 흙에 묻혀 지나고 있었다.
약간의 자작답(自作畓)과 소작답을 부치면서, 일변 밭을 가지고 여러가지로 채소농사를 하여 시내에다 먹히고 하였고, 이 근년은 이 채소농사가 오히려 본업이 되다시피 하였다.
원희 아래로 동생 문희(文熙)와 누이동생 숙희(淑?)가 있으나, 문희는 의사로, 시내에서 병원을 내고 따로 나서 살고 있고, 숙희는 출가를 하였고 해서 그 둘은 시방은 이 집의 원식구는 아니었다.
방안에는,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할머니와 강씨와 원희와, 이런 어른들 말고 저의 어머니를 떨어져 저희 조모 강씨와 함께 이 큰방에서 자고 놀고 하는 원희의 어린 놈 철수(喆洙)와 경수(敬洙)가, 이놈들 역시 세쨋집처럼 초저녁부터 벌써 여기저기 함부로 나가떨어져, 한잠이 들었다.
이 달(11월 ─ 1948년) 초생에 집을 나가 한 달이 되어오도록 소식이 없는 세쨋집의 관희(觀熙)에 대하여, 두루 걱정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던 끝이었다.
방안은 잠깐 말이 끊기고, 묵묵한 가운데 강씨와 원희가 피우는 담뱃대에서 수심인 양 연기만 고요히 피어오른다.
푸뜩 할머니가 입을 연다.

저자소개

소설가(1902~1950). 호는 백릉(白菱)ㆍ채옹(采翁). 소설 작품을 통하여 당시 지식인 사회의 고민과 약점을 풍자하고, 사회 부조리와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작품에 <레디메이드 인생>, <탁류(濁流)>, <태평천하> 따위가 있다.

목차소개

<저자에 대해>
아시아의 운명
1
2
3
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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