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넘어 등단(《월간한비》. 2014년)한 청라 류우복 시인이 미수에 첫 시집을 펴냈다. 시인은 1954년 제1회 서라벌 예술제에서 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그런 시인이 이번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밤잠 설치며 시구詩句를 찾으려고 몽당연필 깎았지만 늘 미흡하여 계면쩍은 심정 불구하고 설익은 시를 해 아래 펼치려 한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시인의 이런 겸양의 말과 달리『가슴벽에 걸어둔 달빛풍경』은 원숙한 깨달음과 감동의 울림을 지닌 정말 잘 익은 시집이다.
4부로 나누어 실은 88편의 시에서 시인은 살아온 88년 그간의 기억과 시간의 궤적을 은근하고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향수, 추억. 자연, 풍경 등 시인의 감성이 가닿아 형상화한 각 시편은 표제작에서 알 수 있듯 고루하지 않고 달빛풍경처럼 고고한 분위기를 풍긴다.
청산에 둘러싸인 한적한/ 마을에 해가 지면/ 달빛이 어둠을 지우고/ … // 초가 마당에 달빛이/ 서설처럼 흩날리면 불면이 귀를 열고/ … / 소쩍새의 달빛 연가 천년 넋이 붉다// … / 달빛이 푸른 솔잎에 영롱한 수를 놓아/ 눈길 사로잡는 그림 한 폭!// 가슴벽에 걸어둔 달빛풍경…. -「가슴벽에 걸어둔 달빛풍경」-
태화강변 모래밭에/ 스무 질 높이의 대숲이 십 리 빼곡히/ 하중도처럼 솟아 있다.// … //세상이 역겨워 속 비우고/ 채우지 않아도/ 바람은 끝없이 시비를 건다// 맑은 물에 물고기 없듯이/ 옹이 하나 없이 매끈한/ 몸매 탓에 벌 나비 찾지 않아도/ 외로움 타지 않고/ 고고한 피리를 불고 있다. ?「피리 부는 십리대숲」-
그러면서도 노시인의 시는 힘이 넘친다. 생명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영원한 꿈을 추구하는 결기 있는 청년의 마음을 담은 시편이 싱싱하다.
작은 씨앗 하나/ 바람의 등을 타고// 대지를/ 한 바퀴 휘익 돌아// 단단한/ 바위틈에 박혀// 잎눈을 내더니/ 꽃잎을 밀어내고// 드디어/ 열매를 맺어/ 반짝이는 결실을// 들마당에/ 내어놓는다.// -「위대한 씨앗」-
들걷이 참새 꽁지 불붙은/ 시월 상달 새벽하늘에/ 절세미인의 입술을 탁본한/ 손수건이 떠 있다.// 맴도는 터주 샛별이/ 군침 흘리지만/ 접근 금지선을 넘을 수 없어/잉걸불 열정 홀로 외롭다.// 탁본한 입술을 내 가슴에 달아주며/ 눈 맞춤한 그녀가/ 월계관 꿈을 품고/ 아득한 부활의 바다에 조용히 쪽배 띄운 저 결기決起// -「그믐달」-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주는 시 전반에서 연민으로 모든 생명과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측은지심과 시심을 읽을 수 있어 감동하게 된다. 시인은 인정과 희망이라는 가치를 시 속에 오롯이 담고 있다.
대구 달성공원 앞 이른 새벽에/ 장이 서고 해 뜰 무렵 파장하는/ 새벽시장이 장마당처럼 붐빈다.// 늦겨울 여명이 쌀쌀한 어느 날/ 시골 할매가 오월보다/ 더 푸른 봄동을 챙겨서 첫차로 왔건만/ 난전엔 빈자리가 없어 구석에 포대기 깔고/ ‘한피기 이처넌’이라 써 놓았다.// 쇼핑 수레 끌고 온 맘 좋은 아주머니/ 봄동 할매 손이 얼었다고/ 안쓰러워하며/ 남은 봄동 떨이하자/ 봄동 할매 언 몸이 눈처럼 녹았다고….// … // -「새벽시장」-
“시는 곧 사람이다. 류우복의 시는 곧 류우복이다. 그는 시를 통해 그 자신을 조용히 내보인다. 그는 꾸밈이 없어 진솔하다. 그는 겸손하여 그의 시도 겸손하다. 그의 시를 읽는 것은 그와 대화를 나눈 것과 같다. 그의 시를 읽으면 행복해진다.” (심후섭. 대구 문인협회장)
잔잔한 가르침과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오는 시집 『가슴벽에 걸어둔 달빛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