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시인선 서른세 번째 시집은 권순우 시인의 첫 시집 『꽃의 변신』이다.
『꽃의 변신』에는 시의 진화를 꿈꾸는 시인이 만들어놓은 낯익은 듯, 낯선, 미묘한 시의 세계가 있다. 낯익은 일상과 대상을 신선한 발상과 감성으로 재발견한 후 다양한 시의 기법에 녹여 형상화한, 시적 묘미가 돋보이는 수작 70편을 수록하였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 기쁨 지나면 슬픔 온다는 걸 알려주려고/ 반질반질한 순리를 싸지르고는/…// 울음소리 슬픈 고라니가/ 풀덤불 속으로 뫼비우스의 띠 같은/ 없던 산길을 새로이 냅니다// 무덤과 무덤 사이는 고라니가 눈 똥// 공깃돌처럼 허물어진 내 젖가슴도/ 진화를 꿈꾸는 오늘입니다. (자서自序 「섬 고라니에게 묻다」에서)
시인은 슬픈 고라니를 자처한다. 시인은 ‘앵두처럼 붉은 똥’으로 표현되는 삶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겠다는 낮은 자세를 지녔다. 사랑과 연민이라는 따스한 정서를 바탕으로 일상과 대상에 깊이 교감한다. 겸허한 자기 성찰로 더 나은 삶을 꿈꾸거나, 깊은 깨달음의 지혜로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시편을 비롯하여 마음속 절절한 그리움을 묘사하고, 희망과 소망으로 모난 역사와 현실을 너그럽게 끌어안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편 등, 온기 넘치는 서정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참신한 언어 감각과 다채로운 은유로 서늘한 통찰이 함께하는‘새로이 난 산길’ 같은 시를 담은 『꽃의 변신』이다.
비구니 학승들 어린 꽃나무에게/ 따순 짚옷 입혀 줄 때/ 내가 든 운문의 길은 추운 기색 역력하다//…/ 나 변복하고 운문사 드는 길// 뒤뜰 선돌 바위에게 무심을 배워/ 무겁던 마음마저 내려놓고/ 운문사 나서는 길// 저녁 예불 종소리에/ 어린 꽃나무들 발목 시릴까/ 떠돌던 내 방랑의 삶에도/ 이제 옥빛 대님을 묶는다 (「운문의 길」)
유골 작업을 하던 유학산 산등성이/ 들었다 놓는 저울추에/ 뼈들의 무게가 얹혀있다//…// 바글거리는 흰개미 몸속에/ 손잡고 별로 뜬 유학산 여름밤 하늘은/ 젓가락만 해져 있다//…// 이유 없이 달아올랐던 적개심이/ 유유한 낙동강 강물에/ 닳은 별빛/ 헹구고 있다 (「별들의 귀향」)
밑동 굵은 후박나무가 달빛을 이고/ 어물쩍 불러 세운 사립문 앞에서/ 한 남자가 굴렁쇠를 돌린다//…// 도정하는 정미소 벨트처럼 그는 운동장 트랙 돌러 간다//…// 철봉에 매달려서야 내뿜는 심호흡에도/ 계절은 관성의 법칙에 맞물려/ 검은 장막 속에서도 파랑새를 울게 했다//…어제 죽은 자들, 오늘이 목마른 것처럼/ 붉은 초침 바늘 걸린 벽에서는 끊임없이/ 굴렁쇠 구르는 소리가 났다//… (「굴렁쇠 남자」)
…// 현해탄 건너온 고추잠자리/ 흙 색깔로 부는 피리에 앉을 때// 단숨에 내리긋는 선 끝에서/ 스케치를 끝낸 남편 옷을 벗겨주던/ 그의 아내가 된 나는// ‘경주 산곡’에 가고 싶었다// 서른아홉 요절한 수평선 붉어서/ 까치놀은 서럽게 지고 (「이인성의 거울」)
이태수 시인은 해설에서 “권순우의 시는 부드러운 서정적 언어를 구사하는 것 같으면서도 시적 묘미를 강화하는 다각적인 은유에 무게를 두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시인은 『꽃의 변신』에서 이미 자신이 원한 대로 ‘맛있는 끼니’(「자화상」)와 같은 든든한 시의 한 끼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