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들에 그득히 담겼던 봄볕은 어느덧 사라지고, 어둠의 뚜껑같은 검은 하늘이 윤곽도 잘 안 보이는데 산 위에 얹혀 있으매, 그 뚜껑의 깨어진 작은 구멍 같은 초나흘 반달이 서쪽에 비껴 걸려 있다. 달이라고는 이름 뿐이 요, 그믐밤보다도 좀 나을는지 말는지 할 땅거미 들 이른 저녁이었다. 꽃필 무렵이다마는 아직도 제법 쌀쌀한 바람이 늦게 돌아오는 마을 장꾼들의 홑두루마기(이 홑두루마기는 겨울에도 입던 것이다.) 자락 속으로 기어든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으나 그 가운데에는 동저고리 바람에 빈지게 지고 팔장낀 사람도 있을 것이요, 좁쌀자루 같은 것을 어깨에 둘러멘 사람도 있을 것이요, 또는 북어 마리나 성냥통 같은 것을 사서 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굼실굼실하는 거무스름한 형상들이 장거리로 드나드는 고갯길로 좇아 마을을 향하고 오며 지껄댄다.
“세상의 인심이 참 살얼음판이야. 눈 없으면 코 베어먹을 세상이지…….
이렇게 지악만 해 가다가는 끝판이 어찌 될는고……?”
“끝판이? 끝도 나는 때가 있겠지……. 창이 나서 뚫어지거나 무슨 요정이 나겠지…….”
“그런데 내 말좀 들어보게나. 오늘 내 하도 기막힌 꼴을 다 보았으니께.”
“무슨 기막힌 꼴을?”
“아따 저 장거리 이 주사네 말일세. 저 지나간 달 봄나무 시작하기 전에 먹을 것도 없고 하기에, 저 학선이를 보세우고 돈 쉰 냥을 한 달 기한하고 두 푼 장변에다 얻어 오지를 않았나. 그랬다가 지난 그믐에 나무 판 돈으로 변전 닷 냥을 해다 갚고 표야 받으나마 상관 없을 줄 알고 마음 탁 놓고 내려왔더니 일전에 별안간 사람을 보내서 부르데 그려. 웬 영문을 몰라서 가봤더니 다짜고짜로 하는 말이 너 왜 돈도 안 갚고 변리도 아니 가져 오느냐고 생떼를 쓰데 그려.”
“그래서…….”
“그래, 기가 탁 막히어 말이 안 나오다가 지난 그믐에 왜 변리 가져오지 않았으냐고 하니께, 이놈 네가 법치가 없으니께 그런 거짓말을 엉뚱하게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며 그러면 돈 준 영수표를 내어 놓으라 하며 왼통 콩팔 칠팔하지 않던가, 나 역시 골이 슬며시 나데 그려, 그래 주거니 받거니 하고 서로 악다구니를 할 즈음에 지나가던 정 순사가 들어와서 듣고 있더니만, 관리는 그런 일에도 상관하는지, 남의 돈을 쓰고 왜 안 갚느냐고 딱딱 을러대며 이 주사 편을 들어서 말하지 않겠나.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나리가 이런 일에도 상관하느냐고 했더니, 아 그만 뺨을 냅다 때리겠지.
그 바람에 이 주사란 작자는 기세가 등등하여지며 눈을 부리대고 토막을 들먹거리며 당장에 돈을 가져 와야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주재소 구경을 시킨다고 그러데 그려. 아무리 분한 생각이 나지마는 촌놈이 수그러지지 않으면 별 수 있나. 하는 수 없이 오늘장에는 꼭 해다 갚겠다고 다짐두고 왔다 가…….”
“그 정 순사는 무슨 상관이여?”
“아따 이 사람, 너 순사도 있는 놈들 편에 붙어 서서 이런 가난뱅이 촌놈을 긁어먹는 판이 아닌가? 그래 좌우간에 어찌할 수가 있나. 오늘 가서 집문서를 대신 들여놓고 오네 그려. 리 변전을 다시 둘러메고, 변은 거듭 무는 셈이고…… 참 기가 막혀……. 없는 놈은 이렇게 죽어 지내야 옳단 말인 가.”
“그러니께 없는 놈은 점점 죽을 고비로만 들어간다네. 막다른 골목으로 만…….”
“막다른 골목에서는 돌쳐 선 개도 범보다 무섭다고…… 네기를 할…….”
“세상이 다 되어 가느라고 그런지, 이 동네만 한대도 걱정이여. 변이여, 변! 예전에는 그렇게 오붓하고 탐탁하던 동네가 아주 망하게 되어 가니, 살수가 없어서 집 문서가 반수 이상이나 빚으로 남의 손에 가 들어 있지를 않는가, 해마다 서간돈지 어딘지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늘지를 않나……,
모두 변이여, 변!…… 또 무슨 딴 변이 생길는지 누가 아는가?”
이 사람들은 이같이 주거니 받거니 지껄이며 마을 안길로 접어들어 섰다.
“어, 저 장돌네 집에 불이 다 켜졌네 그려, 인제 왔는가?”
“일전에 왔다네.…… 우선 그것만 보게. 그 이 주사란 작자가 제 일가붙 이인들 대단히 알겠나. 얼마 동안 그 집에 가서 얻어먹고 있다가 필경에는 내밀려서 쫓겨왔다네, 아무리 병신이요 홀로 된 제 일가 아낙네기로소니 그같이 모으기에만 악독한 놈이 돌아다보겠나.”
“에이 ─ 흉악한 놈, 그러니 어린 것들은 있고 어찌 산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