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의 연애 동안 핑크빛으로 차올랐던 연애 초반의 빛깔은 낡은 굴뚝에 들어찬 그을음처럼 칙칙하게 퇴색됐다.
누군가는 그것을 ‘정’이라 칭했고, 다른 이는 ‘권태’라 명했다.
‘무난하게’라는 단어가 무색하도록 무난하게 살아온 송하연에게는 연애도 그러하다. 하연은 여중, 여고를 거쳐 또다시 여자뿐인 간호학과를 나와 간호사가 되었다. 남자라고는 없는 그녀의 삶에서 처음 나타난 남자가 간호사 2년 차 무렵에 다가온 상우 씨였다. 하연이 근무하던 정형외과 병동으로 입원하여, 병원 밖에서 차 한 잔으로 시작된 만남이었다. 하연에게 상우 씨는 처음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다. 첫 사랑, 첫 연애, 첫 키스, 첫 경험…….
‘처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한 그들의 연애는 서로 두텁게 쌓인 추억과 함께 구태의연한 일상으로 굳어져버렸다. 차갑게 식어버린 연애에서 대처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끈끈하고 견고하게 다져진 ‘정’을 바탕으로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거나,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굳어버린 심장이 티내고 있는 ‘권태’를 이유로 남남으로 갈라서거나. 이들은 견고하게 다져진 ‘정’을 바탕으로 결혼을 결정한다.
하연과 상우 씨 사이의 위태로운 권태에 이유겸이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오래된 연인까지 있으면서 여자들에게 들이대는 것이 심하여 병원 내에서 기피 대상이지만, 어쩐지 하연은 유겸이 신경 쓰인다. 유겸의 적극적인 행동에 몸은 피하지만, 마음은 자꾸 열게 된다. 하연은 자꾸만 유겸을 보면 달아오르는 자신을 보며 ‘첫 사랑’인 상우 씨와는 신선함만 있었을 뿐, 뜨거움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에게 뜨거웠던 적이 없는 하연의 달라진 행동을 보며 상우는 눈치를 채게 되고 싸움의 끝에서 둘은 걷잡을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자신의 존재로 인해 좋지 못한 소문에 얽매여 평범한 일상을 잃게 되는 하연을 바라보며 유겸은 그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였던 자신의 욕심이 지나쳤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유겸은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서 연인이 되려고 노력하였던 다미를 두고 떠난다. 유겸이 떠난 뒤에 하연은 유겸이 상우 씨를 만나기 이전부터 자신을 바라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상우와 자신의 방이 어느 새 비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유겸 사이에서의 하연은 방황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