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각 입내하옵시라는 전교가 곕시오.”
대궐에서의 이러한 급명을 받잡고, 황황히 의대를 갖추는 국태공 흥선대원군 이하응(國太公 興宣大院君 李昰應).
때는 고종(高宗) 십삼년 임오 유월 초아흐렛날. 봄내 여름내 비 한 방울 오지 않아서 온 천하가 타는 듯이 말라붙었던 것이 (오늘 아침까지도 비올 모양도 보이지 않던 날씨가) 갑자기 흐리기 시작하여, 하늘은 먹을 갈아 놓은 듯하고, 주먹 같은 비가 우더덕 우더덕 오기 시작하였다.
바야흐로 악수로 내려부으려고 비를 맞으면서 행차는 뜰안에 착착 정비되었다. 이 행차를 굽어보며, 오래간만에 몸에 걸치는, 대원군의 정장(正裝)을 갖추는 동안, 태공은 감회무량하였다. 현복, 사모, 옥대, 기린흉배- 그새 사년간을 의장에 넣어둔 채 한 번도 입어 볼 기회가 없던 이 의대- 다시는 입을 기회가 없으리라고 믿었던 이 정장. 왕의 급명으로서 다시 입궐할 기회를 얻어서 몸에 걸치는 동안,(이미 사소한 감동에는 움직이지 않을 만치 늙은) 그의 마음도 공연히 설렁거렸다.
“자. 어서 가자.”
이윽고 준비는 끝났다. 남여에 몸을 커다랗게 올려놓으며 행차를 재촉할 때에, 늠름한 구종 별배들에게 호위된 태공의 행차는, 벽제 소리 우렁차게 교동 운현궁을 나섰다.
임오군란(壬午軍亂)-.
임오 유월 초아흐렛날 폭발된, 군인들의 변란, 그것은 처음에는 단순한 한 개의 군란(軍亂)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자면, 아직껏 십여 년간을 조선의 위에 커다랗게 날개를 폈던 태공이 없어지고,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된 지도 이미 팔 년.
명색은 비록 왕의 친정이라 하나, 사실에 있어서는 왕의 친정이 아니었다.
왕비 민씨 및 왕비의 친척 일당의 정치였다. 이렇게 민씨 일당의 정치가 시작 된 지 팔개 년간, 무섭게 뻗친 민씨 일당의 농락은, 용서없이 이 국민을 착취하였다.
조선팔도 삼백주에서 들어오는 온갖 세납들은, 모두 국고로 들어가는 것은 없이 민씨 일당의 사고(私庫)로 들어가고, 민씨 일당의 사고로 들어가기 전에 일부분은 먼저 지방 장관들의 사복으로 들어가고- 이리하여 국고는 언제든 텅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