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몸이 꽃이면
부는 바람에 날려
저 담장을 안 넘으리
넘어서 길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밟히지나 않으리
가셨다 오시는 길이나
오셨다 가시는 길에
매양 밟히지 않으리
백제(百濟)의 서울 부여성(扶餘城)의 의자왕궁(義慈王宮)은 마치 은행꽃 위에 떠있는 부성(浮城) 같이 수천폭이라는 은행나무 밭속에 둥실 솟아 있는데, 때가 마침 하사월 초순(夏四月 初旬)이 되어 쌔하얀 은행꽃들이 왕궁에서 피기 시작하여 팔백 여든이나 되는 절간과 백만장안의 가가호호(家家戶戶)에 안개가 낀 듯이 자욱히 끼어있으며 그 위에 후눅후눅한 사월 남풍(四月 南風)이 불어 넘칠때 마다 가지마다 피어 있던 꽃잎들이 눈보라 치듯 우수부 떨어져 길에나 담장에나 노새등에 아낌없이 쌓였다.
지금 이 은행나무 밑에 남색도포(藍花道布)에 관(冠)을 쓰고 허리에는 오동(梧桐)잎 모양으로 수를 놓은 긴 칼을 찬 청년 무사(武士) 한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높다란 왕성(王城)을 자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한발 자국 떼어 놓고는 불타는 눈동자로 천길 만길되는 성안을 바라보며 또 한발 자국 떼어 놓고는 또 바라 보다가 나중에 담장에 자기 귀를 맞대고 한참 듣는 것은 제 목소리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그렇게 된것이 아니고 행여나 성안으로 부터 모기소리 만치라도 한 두마디의 화답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그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두 겹을 친 병풍같이 길고도 긴 궁궐안으로부터는 기침 소리 한 마디 들리지 아니하였다.
무사는 안타까운 듯이 눈초리를 성벽(城壁)에서 돌려서 지향없이 먼 산을 우두머니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