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와 관련있는 이야기를 쓰라는 편지를 받고 나니 까마득히 잊고 살아온 박 노인 생각이 머리에 붕 떠오른다. 해방 전 일이니까 벌써 20년 가까이 된다.
그때 나는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해서 닿을 수 있는 K역에서도 한 십리 동쪽으로 들어간 ‘궁말’이란 산기슭 두 집 뜸에 살고 있었다. 아내 말을 빌리면 객기였지만 내 딴에는 농민 문학을 하자면 농촌에 들어가서 농민들과 생활을 같이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지금 와서 보니 그것이 ‘객기’요 ‘패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때만 해도 젊었었다.
레이몬드의 「농민」과 같은 4부작을 써서 일약 문단을 한번 뒤집어놓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촌에 들어가 보니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첫째 생계가 서지 않았다. 서울이 가까우니 채소를 해보겠다던 것도 꿈이었고, 자리잡고 독서를 해보겠다던 계획도 허사였다. 만 5년간 봉놋방에서 막걸리 타령을 하다가 해방을 맞은 셈이 되고 말았었다.
그 덕에 몇 푼의 퇴직금은 물론 서울에 있던 일곱 칸 반짜리 집도 날아가버리고 없어, 5년이 되도록 집 한 채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궁말’에서의 5년간을 허송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이 5년간이 내가 가장 선량한 사람들과 생활한 기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나는 단 한 사람의 지주를 제하고는 거의 양처럼 ─ 아니 흙처럼 순진한 사람들과 사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박 노인도 대대 궁말에서 살아오는 선량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지금도 바다를 모르는 충청도 산골 사람이나 강원도 저 깊숙히 두메로 들어가면 기차를 타보기는커녕 구경도 못한 사람이 많다지만 해방 전만 해도 궁말은 안 그랬었다. 비록 오봉산 기슭에 두 집 뜸, 세 집 뜸, 가물에 콩나듯 자리잡은 동네이기는 했지마는 K역까지 십리라고 하나 실은 8마장 상거밖에 안 돼 있었고, 한 시간이면 서울역에 와서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소위 지나사변이 일어나고 ‘대동아전쟁’이 잇달아 터지자 식량 사정 때문에 서울 사람은 시골로, 시골 사람은 서울로 엇바뀌어 왕래가 잦았던 터라 기차 못 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차를 타보지 못한 사람이란 이이들까지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 궁말에서 50이 넘도록 기차를 타보지 못한 사람이 바로 박 노인이었다.
타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뭣이? 날 보구서 기차 못 타본 사람이라구? 그래, 못 타본 것과 안 타는 것과 같단 말인가? 같아?”
기차 이야기가 나오면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 박 노인이었다.
“그래, 말 좀 해보게나! 안 타는 것과 못 타본 것과가 어떻게 같으냐 말야?”
“그야 둘러치나 메어치나 마찬가지지! 안 타서 못 타봤거나 못 타서 못 타봤거나!”
일부러 이렇게 세워대면 박 노인의 그다지 상스럽지 않은 윗수염이 성난 짐승의 털처럼 곤두서는 것이다.
“그래, 그게 같은 말야? 안 탄 것하구 못 탄 것하구가? 그래, 여보게, 창선이. 자넨 학교두 다니구 했으니 알겠네나. 해명을 해주게나. 저런 무식한 사람들이란 배운 사람의 말이라야 믿는 모양일세나!”
젊은 사람들이 옆에 있을라치면 이렇게 편을 들어달란다.
그러나 젊은 패들도 여럿이 그렇게 우기는 본의를 알기 때문에,
“거 같은 말이지 뭐여유, 아저씨.”
하고 되려 이쪽 편을 들면,
“에이끼! 천치 녀석들! 공부 헛했구나! 헛했어!”
이 정도면 좋았다. 한번은 창선이가 우겨대다가 담뱃대로 등줄기를 한 대 얻어맞은 후로는 달아날 구멍부터 보아놓고서야 말대꾸를 하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