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두
화양극장
OK, Boomer
괸당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
당춘
오즈
김일성이 죽던 해
해설 | 소유정(문학평론가)
낙차의 기록
작가의 말
우리는 왜 누군가에겐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누군가에겐 그토록 매정할 수밖에 없을까
소설집의 문을 여는 수록작 「언두」에서 두 집 살림을 하는 아빠와 그런 아빠를 묵인하는 엄마를 보며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 마음에 들지 않을 땐 화면을 가볍게 밀어 거절할 수 있는 관계”만을 찾던 ‘나’는 데이팅 앱에서 만난 ‘도호’와 내밀한 가정사까지 공유하게 된다. 도호는 농인인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동안 많은 것을 희생하며 지내왔다고 말하고, ‘나’는 그런 도호를 “함부로 동정하지 않으려”, “‘난 다 이해해’ ‘괜찮아’ 따위의 무책임한 말을 뱉지 않으려” ‘쿨’하게 굴지만 내심으로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도호네의 생활이었고 사정”일 뿐이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도호네의 생활은 ‘나’가 도호와 가까워짐에 따라 점차 ‘나’의 생활이 되어간다.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들은 이제 이해하고 감내해야만 하는 것들이 되어 ‘나’를 짓누르고, ‘나’는 “너무 무거”워진 그 무게를 끝내 외면할 수밖에 없다.
「OK, Boomer」에서 전교조 소속의 진보적 교사이자 젊은이들의 문화를 수용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고 자부하는 ‘나’는 대학원에 다니다 음악을 시작한 아들이 밴드 멤버와 집을 방문해오면서 그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게 된다. ‘베이비 부머’, 586 세대인 ‘나’의 눈에 ‘MZ 세대’인 그들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점투성이이나 ‘나’는 그런 그들을 너그러이 이해해보려 한다. 하지만 베지테리언이라며 고기에 치즈까지 뺀 피자를 먹는 것이나 웃어른 앞에서 통성명조차 않고 제 할일만 하는 모습은 그렇다 쳐도, 자신이 살아온 이력을 대표하는 전교조 상패를 함부로 다루는 모습만은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결국 그들에게 집을 나가라고 완고히 말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떠나간 뒤 ‘나’가 냉장고에 있던 고기를 몽땅 꺼내서 구워먹는 장면은 우스꽝스러운 한편 일말의 서늘함을 남겨놓는다.
「OK, Boomer」가 세대의 경계를 그려냈다면 「괸당」은 소속, 즉 공동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주에 사는 ‘나’는 북카자흐스탄에서 관광 온 고려인 재종숙 부부를 반나절 동안 가이드하기로 한다. 촌수로 따지자면 남이나 다름없지만 아버지는 그들 또한 ‘괸당’이니 잘 대접해야 한다고 말한다. 집성촌이 발달한 제주 특유의 문화인 괸당은 끈끈하고 촘촘하게 결속된 친인척 관계를 뜻하는데, 실제로 ‘나’의 괸당들은 고려인 강제이주와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아픔을 매개로 재종숙 부부와 정을 나누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재종숙 부부가 제 부친의 뼈를 고향땅인 제주에 묻고자 노동 비자를 얻으러 왔다고 고백함과 동시에 괸당들은 그들을 괸당의 테두리 너머로 배척한다. ‘나’는 자신이 그러한 괸당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재종숙 부부를 향해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괸당들의 태도에 덩달아 죄책감을 느낀다. 여기에 제주 토박이가 아닌 외지인이자 여성으로서 과거 당숙모가 받아야 했던 핍박이 겹쳐 그려지며, 마주보기의 실패는 차이와 경계에 따른 차별의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어둠을 걷으면 또다른 어둠이 있을 거라 여기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어둠을 걷으면 그 안에는 빛이 분명 있다고.”
수많은 오해와 외면의 시간을 건너
마침내 서로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앞선 작품들이 오해와 외면을 낳는 경계 자체의 완고함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면 「당춘」 「오즈」 「화양극장」은 인물들이 경계를 넘어서서 마침내 서로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을 조명한다. 「당춘」에서 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십대 청년 ‘나’와 ‘헌진’은 농촌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유튜브 영상 편집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영식 삼촌’의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고 진천으로 향한다. 처음에 이들은 청년과 노인이 어우러지는 공동체를 꿈꾸는 삼촌의 이상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기지만, 죽은 줄 알았던 땅속에서 강인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생명을 찾아내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실패할 용기를 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며 어쩌면 자신들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린 동생의 사고사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는 「오즈」의 ‘나’는 독거노인 하우스 셰어링 사업을 통해 무뚝뚝한 할머니 ‘오즈’와 함께 살게 되는데, 서로 데면데면하게만 지내던 어느 날 ‘나’의 몸에서 타투를 발견한 할머니가 자신도 타투를 받고 싶다고 말해온다. 그렇게 보게 된 할머니의 몸에는 그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시사하는 치욕스러운 일본어들이 자리해 있다. 몸 여기저기에 남은 주저흔을 덮기 위해 셀프 타투를 시작했던 ‘나’는 이제 할머니의 흉터 위로 꽃을 새겨나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을 함께하며 두 사람은 ‘노인’과 ‘요즘 애’가 아닌 ‘오즈’와 ‘하라’로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화양극장」 역시 「오즈」처럼 노년 여성과 청년 여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임용 고사에 수차례 낙방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경’은 자신의 숨소리를 거슬려하는 아버지를 피해 찾은 도피처 ‘화양극장’에서 어딘지 독특해 보이는 할머니 ‘이목’을 알게 된다.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줄거리로 요약되는 인생을 이어가느니 이대로 몇 롤의 필름들과 연소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경은 다른 노인들처럼 설교를 늘어놓는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이목과 오래된 영화들을 함께 보면서 조금씩 삶의 온기를 되찾아가지만, 이목에게 이미 결혼해 자식까지 둔, 오래된 동성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세계를 쉬이 이해할 수 없어 머뭇거린다. 그러나 머지않아 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목의 곁에 있겠노라고 마음먹는다. “이목씨가 기꺼이 그래주었듯, 자신도 그의 편이 되고 싶다고.” 이처럼 지역과 세대, 성지향성을 가르는 겹겹의 경계 앞에서 망설이면서도 끝내 연대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차별과 배제의 언어가 팽배하는 오늘날 더욱 의미 깊게 다가온다.
자전소설로도 읽히는 「김일성이 죽던 해」에서 소설가 ‘나’는 좋은 소설이 무엇인지 묻는 한 수강생의 질문에 이렇게 생각한다. “주인공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는 소설.” 타인을 향해 걸어가는 성해나의 인물들이 때로 비틀거려 위태로워 보일지라도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타인을 손쉽게 단정하지 않고 이해가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한번 타인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진중하고 올곧은 성해나의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마음에 자그마한 빛이 생겨나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언제고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해도 여전히 그곳에 자리하고 있을 그 빛. 그러니 ‘빛을 걷으면 빛’이란 이렇게 건네오는 말이 아닐까. 눈앞의 빛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안에는 분명 또다른 빛이 있다고, 그러니 “견디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살아내지 않고, 살아가”자고(「화양극장」). 충분히 다정하고 품이 넓은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