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
감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뼈처럼. 감자. 빛처럼. 감자.
한 무더기 감자가 일제히 나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 김이 와서 감자 한 알을 가져갔다.
아버지 이, 박, 최가
내 뒤에서 자꾸만 감자를 가져가고 있었다.
아버지 김, 이, 박, 최의 품속을
감자는 자꾸만 파고들고 있었다.
품속의 옅은 빛에 의존해
감자는 자꾸만 내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_「감자 독백」 부분
첫 시 「감자 독백」은 “아버지 김, 이, 박, 최”가 화자 ‘나’의 뒤에서 자꾸만 감자를 가져가더니 종래에는 아버지도 감자도 사라지고 “나 혼자” 남게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시가 자아내는 모종의 존재론적 불안은 어쩐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일면 슬프고도 섬뜩한 정조를 형성하는데, 이것은 ‘무엇이든 피어나는 내부’라는 제목을 단 1막을 관통하는 분위기이다. 동네를 거니는 개 ‘릴리’가 죽고 나서 그 “개의 이름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는 「술래잡기」, “풀밭 위에서” 혼자 “탈탈탈탈” 돌아가는 미싱의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미싱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미싱」, “유령을 볼 수 있다는 아이들에게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만큼 키가 작은 “난쟁이 유령”의 속삭임을 들려주는 「물장구」 등은 이 정조를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한 번쯤 느낄 법한, 자신과 타자, 그리고 세상 사이의 간극과 그로 인한 ‘낯설어짐’이 박승열 특유의 스타일로 표현된다.
한편, 2막(‘두 날의 꿈은 완전히 달랐다’)과 3막(‘오류도 기원도 모르고’)은 다양한 시적 주인공들의 사연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박승열만의 활달한 무대이자 시의 놀이마당이다. “충격적이지 않으면 그건 영화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배우이자 화가”이면서 여러 ‘에고(ego)’로 분열하는 가상인물 배두나를 그린 「배두나」, “세상에 살아남은 마지막 마법사 중 한 사람인 조셉”(「변신하지 못하는 변신 마법사」), “자신이 레몽 끄노임을 모두가 알고 있어서 너무 불안”한 레몽 끄노(「레몽 끄노의 것」),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모른 채 “고쳐야겠어”라고 중얼거리는 필립 모리스 유통회사의 회장 필립 모리스(「필립 모리스 유통회사」) 등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다. 저마다 처한 문제나 내면의 분열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의 모습은 흔히 ‘카프카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미로 같은 상황 속에서 때로는 농담처럼, 때로는 악몽처럼 이어진다.
두나는 자신이 원래 두나에고 중 하나였다고 했다. 그것도 가장 최신형의. 16종의 두나에고를 만든 송강호씨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여러 개의 두나에고를 가진, 에고 상품계의 혁명이라 불릴 만한, 열일곱번째 두나에고를 만들어냈다고.
성공한 두나가 아니라 혁명적 두나에고였군요.
아니요.
_「배두나」 부분
이 시집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저자인 ‘박승열’과 동명의 화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시인이자 대학강사였던 박승열씨”(「내 나이가 어때서」)는 삼십대에 꿈의 한 장면을 옮겨 적은 시가 수록된 시집을 펴냈지만 곧 절판되었고, 칠십대가 된 지금 또 한번 꿈을 옮겨 적은 새로운 시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과거의 꿈과 현재의 꿈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그는 “분명하게” 구분한다. 마찬가지로 시인과 동명의 화자가 등장하는 3막의 「정월 대보름」 「실제 모델」까지 살펴보았을 때 시인의 의도는 한층 선명해진다.
정월 대보름에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태 쓴 시를 다 합쳐도 오늘 꿈에서 쓴 시 한 줄만 못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 한 줄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고
(……)
‘싶다’는 말은 이제 그만, 시에 대한 시도 이제 그만, 박승열씨가 등장하는 시도 이제 도저히, 아 또 3이다 관습적 언어를 폐기하려고 써왔는데 습관성 리듬에 갇혀버리다니 박승열씨도 이제 늙어버린 건가 싶고
아마 꿈에서 쓴 시는 영영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정월 대보름 날에는
환하게 뜬 보름달이나
보면 그만이지
싶다,
_「정월 대보름」 부분
누군가를 실제 모델로 한 내 인생이 또다른 누군가의 실제 모델이라면
또다른 누군가의 실제 모델은 나인가, 아니면 내 실제 모델인 누군가인가
_「실제 모델」 부분
이러한 시들에는 시인 자신을 모델로 삼는 예술적 자의식과 메타시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 일종의 자기예언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내부의 자아와 그러한 자신을 관찰하는 바깥의 또다른 자아를 오가며 오직 시를 쓰는 ‘현재’만을 살아가고 싶은 욕망, 그것이 박승열 시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름을 넣을 새” 없이 “시를 쓰고 나면 곧장 창을 닫아”(「활자기피증」)버리는 시인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웃는 얼굴”(「마작 치는 사내」)을 고수하고자 하는 시인이다. 앞으로 이 시인이 시라는 장르의 외연을 넓혀가며 어떠한 도발적인 모험을 펼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정향과 우회를 거듭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의 핵심이다.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거리의 역설이 아이러니의 정수이다. 아하, 이 3막극은 낭만적 아이러니 극장에서 상연되는 것이겠다. (……) 한계 속의 되풀이와 우회하면서 다가가기, 그리고 다가가면서 우회하기가 아이러니의 운동 궤적이다. 박승열은 바로 이 운동 속에서 시를 감행하고 있던 것이다. 다음 상연에서도 우회와 정향의 되풀이가 지속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극장이 열릴 것인가……”
_조강석,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