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노파람이 돌아왔다.
집 밖 세상으로 나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을
단단히 손에 쥔 채로.
『독고솜에게 반하면』 허진희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2019년 『독고솜에게 반하면』으로 제10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받은 허진희 작가가 3년 만에 펴내는 청소년소설이다. 숙식 제공 아르바이트를 하러 수상한 식당에 들어선 노파람이 다시 집에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겼다. 열일곱 살의 겨울방학, 난생처음 가족이란 울타리를 벗어난 노파람이 혼자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녹록지 않다. 강렬한 매력을 풍기지만 실상은 노파람을 이용하려 덫을 놓고 있는 사람, 노파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무작정 다가와 거리를 좁히려는 사람, 노파람을 그저 배경처럼 여기며 무시하는 사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다종다양한 욕망이 들끓는 이곳에서의 시간을 지나 무사히 귀환한 노파람의 손에는 중요한 깨달음이 들려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는 얼마큼인가 하는 것. 그리고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건 ‘믿는 마음’이라는 것.
그 마음엔 힘이 있었다. 벅차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파람은 생각했다.
믿는 마음이 약점일 리가 없다고. _본문에서
"네 약점을 팔지 않겠니? 보수는 넉넉할 거야.“
“저는 사장님의 사과를 사고 싶어요. 진심으로 하는 사과를요.”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것은 육식을 위한 도축이 전면 금지되고 오직 실험실에서 만든 배양육을 먹는 것만이 허용되는 세계, 일명 ‘무해한 육식주의자들’의 세상에서 남몰래 ‘금지육’을 파는 식당이다. 은밀히 모여든 각계 유명 인사들은 짐짓 고상한 듯 굴지만,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상률을 거스르는 것도 서슴지 않는 윤리 감각과 특권 의식을 돌발 상황마다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한 줌 위선과 가식으로 이루어진 가면은 소설의 말미,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식당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모두 벗겨진다. 한 편의 블랙 코미디와도 같은 이 소설은 번번이 예상을 비껴가는 전개와 독특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 구축을 통해 독자를 단박에 끌어당긴다는 점에서 『독고솜에게 반하면』을 잇는 또 한 권의 페이지터너라 할 만하다.
강력한 호기심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동력 삼아 어른들이 만든 세속의 판도를 바꾸어 버리는 여성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세웠다는 점 또한 작가의 전작과 궤를 같이한다. “사장님, 이제 다 끝났어요. 내가 이곳을 망하게 할 거니까요.” 최후의 강수를 두며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하는 노파람의 눈동자는 단단하고 고요하다. 멀리해야 할 사람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고 유해한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 첫눈에 끌리는 사람과는 얼마큼 가까워져도 되는 건지, 함께하면서도 서로를 짓누르지 않을 정도의 안전한 거리는 어떻게 찾는 것인지를 다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관계에서의 거리 감각을 익히는 일은 곧 스스로를 지켜 낼 힘을 기르는 일이라는 사실을, 노파람의 강단 있는 눈동자는 말해 주고 있다.
……파람의 까무께한 눈동자는 그 안에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듯
단단하고 고요해 보였다. 무슨 말을 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_본문에서
안전하게 독립하고 씩씩하게 자유로워지기 위해
당신도 언젠가는 길을 나서게 될 테니까
허진희 작가는 “어떻게 하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독립하고, 씩씩하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은 채 소설을 써 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사이, 그러나 언제까지나 늘 함께일 수만은 없는 사이인 가족에 대한 애증 섞인 고민이 소설 속 세 명의 청소년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노파람은 엄마와의 닮음이 불안하고, 스타 패밀리의 일원인 탠저린은 부모님과 세트로 묶이는 것이 못마땅하다. 누나에게 의존하며 살아온 공비수는 떠나고 싶은 마음과 머무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중이다. 이 통과의례적 고민에 대한 답을 세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구하듯이 책을 읽을 청소년 독자들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갈 테지만, 소설은 넌지시 하나의 답을 조언처럼 건넨다. 서로의 닮음을 애틋이 여기기 위해 한 번쯤 멀찌가니 떨어져 보는 건 어떠냐고. 언제든 부르면 한달음에 달려올 거라는 믿음이 전제되는 딱 고만큼의 거리를 두고서.
한 사람을 온전히 좋아하기만 할 수도,
완벽하게 싫어하기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가장 처음 깨닫게 되는 건 바로 가족을 통해서인지도 모른다. _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