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를 묻는다!
박화성·박경리·박완서의 뒤를 잇는 선 굵은 작가의 탄생
◎ 도서 소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풍파,
전쟁과 이념에 희생되고 요동치는 민중의 삶
일제강점기를 거쳐 미군정 시대, 한국전쟁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시처럼 밀어붙인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시절을 관통하는 이 소설은 평범하기만 한 등장인물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불행에 빠지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야기는 전북 지방 두 집안의 혼사에서 시작된다. 경사여야 할 혼사로부터 비롯된 인간관계가 해방과 한국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남북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비극으로 발전한다.
전쟁이란 대개 위정자들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 즉 개인을 생각하고 보호하려는 위정자들은 없다.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가 왜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작가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 질문은 전쟁통의 국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된 이후에도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위정자들이 통치하는 내내 이들 주인공 가족에게 불어닥친 시련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복잡한 인물 관계를 책 뒤에 부록으로 붙여 이해를 돕고 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들의 낯선 이름을 궁금해하며 종이에 연필로 관계도를 그리며 읽는 수고를 감쇄시켜 주는 세심함을 보이는 것이다. 그만큼 등장인물도 많고 시간적 흐름도 긴 『태양의 그늘』은 특히 기나긴 겨울밤을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 서평
질곡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새로운 대하소설
국민을 위한 국가란 한 번이라도 존재한 적 있는가?
억울한 운명 속에서도 가족의 삶을 지켜낸 부부의 이야기
『태양의 그늘』 전면 개정증보판!
‘대하소설’이 그립다. 우리 현대문학이 시작된 이래 김동인, 유주현, 이병주, 김주영, 황석영, 조정래 등의 유려한 소설들을 접해왔다. 그러나 요즈음은 이러한 대하소설을 접하기가 힘든 분위기다. 간간이 박경리, 최명희 등 여류 문사들의 작품이 있었으나 이후로는 보이질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태양의 그늘』(전 3권)을 만나게 된 일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대체로 대하소설이라는 것은 기나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얼개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질곡의 역사로 주름진 우리나라의 특성상 대하소설이 등재될 여건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출판시장에서 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들의 호흡이 그만큼 짧아졌다는 얘기고, 좋게 말하면 넓게 보기보다 깊이 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들의 호흡이 짧아진 것은 독자들의 호흡이 짧아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깊이만 하더라도 요즘 독자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작가들을 그렇게 몰아간 탓이 클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종휘 작가는 독자들에게 휘둘리기보다, 독자들을 이끌어 나가는 유형에 가깝다. 긴 안목으로 넓은 세상을 이해하고 인생의 의미가 얼마나 유현(幽玄)한지 아는 방법 중에, 긴 호흡의 소설을 읽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아는 작가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도덕 교과서가 아닌 바, 읽는 재미를 빠뜨릴 수 없다. 『태양의 그늘』은 그런 면에서도 으뜸이다.
◎ 책 속에서
“아니, 야가!”
정임의 눈이 똥그래졌다.
둘째아들 재명이가 만주에서 인편에 보낸 포대 안에는 작은 보따리들이 들어 있고, 그 안에 다시 한지로 둘둘 말아서 묶은 돈다발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얼핏 봐도 백여 다발 이상은 되어 보였다.
재빨리 돈다발을 덮은 다음 바깥쪽을 쳐다보던 정임은 돈을 다시 포대에 넣고 단단히 묶어 다락 안쪽에 밀어 넣었다.
[1장 팔천 겁의 인연, 9쪽]
“허기사 이름이 비밀일 건 없지요. 채봉이여요, 윤채봉.”
작은딸의 이름을 들은 공 씨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윤채봉, 윤채봉’ 하면서 연거푸 되뇌자 아주머니는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되는 사람은 성깔이 대단하고 농사도 많이 짓는데, 아들들이 서울에서 사업을 크게 하고, 전주에 제지공장을 차려서 막내아들한테 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들의 풍채는 어떠냐고 묻자 다들 아저씨 두 배씩은 될 거라며 깔깔 웃었다. 공 씨는 아주머니의 말을 끊을세라 연신 고개만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다.
“여기 배차장 건물도 그 어르신네 것이구요.”
“배차장 사장님이신가요?”
[1장 팔천 겁의 인연, 48쪽]
“거사님의 운명은 여느 사람들과는 다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일파는 평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쁜 일인가요? 그건 아니겠지요, 스님?”
채봉이 매달리듯 물었다.
“나쁘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고 말하듯이 세상사 모든 것은 다 본인 하기에 달린 겁니다. 덕원 스님의 말씀도 결국 경건하게 치성드리면서 머리를 맑게 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뜻이겠지요.”
일파는 더 말하지 않고 배웅을 마친 후 들어갔다. 평우는 채봉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듯하자 재빨리 화제를 바꾸려 들었다.
[제2장 신혼, 106~107쪽]
평우가 상기된 얼굴로 벌떡 일어나면서 채봉을 내려다봤다.
“당신 제발 가족, 가족 좀 허지 마! 내가 가족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이여? 조국도 가족에게 물려주는 소중한 유산이잖아.”
“누가 아니래요? 하지만 사람은 조국이라는 유산이 있어서 태어난 게 아녀요. 무조건 국가가 먼저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요.”
“내 말은 택일론이 아니라 둘 다 소중하긴 마찬가지라는 거여.”
“그러니까 당신은 저 사람들처럼 목숨을 내놓겠다고요?”
“제발, 너무 비약 좀 하지 마!”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평우가 화를 간신히 참았다.
“비약이 아니라 현실적인 얘기여요.”
[제3장 조국, 150쪽]
수심이 가득한 채봉의 얼굴을 바라보며 태섭이 한숨을 쉬었다.
“으음, 나랏일 허는 놈들이 백성 생각은 안 허고 즈놈들 실적 올릴라고 생사람이나 잡아가고 원……. 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혀도 그것이 무슨 죄가 되겄냐. 너무 걱정헐 일은 아닌 거 같다.”
그때 재명이 들어오면서 채봉을 보고 반색을 했다. 막내가 어쩐 일이냐며 석연치 않게 쳐다보는 재명에게 채봉은 다시 평우 이야기를 간단히 했다.
“아무려믄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야 허겄냐.”
옆에서 같이 듣던 태섭이 애써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요즘 가만히 있으면 동조죄, 끼어들면 선동죄, 하면서 걸리적거리는 놈은 죄다 처넣는 세상인데?”
재명은 놀라움과 걱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채봉을 바라봤다. 멍하니 서 있던 채봉이 맥없이 쓰러지듯 소파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제4장 잔인한 가을, 208~209페이지]
스무 발의 총성과 함께 열 명의 죄수들이 고꾸라지면서 앞에 파놓은 긴 구덩이로 쓰러졌다. 다시 두 번째 죄수 열 명이 끌려 들어왔고, 이번에도 죄수들이 정해진 위치에 세워진 다음 사수들은 총을 놓고 앞으로 나가 눈가리개를 씌우고 번호표를 부착했다. 눈가리개를 씌우기 위해 죄수 앞으로 다가선 필구는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입대하기 얼마 전 자기에게 역사의 흐름을 말해주면서, ‘역사는 결국 물의 흐름과 같이 정의로운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으며 그 흐름 속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가 숙제로 남는다.’라는 가르침으로 자신이 군대에 조기 지원하게 된 정신적 이유가 되었던, 바로 그 남평우 선생님이 자신의 총알받이로 사형수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판단을 위해 망설일 시간은 단 일 초도 없었다.
“총소리가 나면 앞으로 쓰러지세요. 저 필굽니다.”
필구는 앞자리 사수가 먼저 끝내고 갈 때까지 시간을 약간 끈 다음 평우의 눈가리개를 씌우면서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제4장 잔인한 가을, 242쪽]
서둘러 처형장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나무둥치에 몸을 숨겨가며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한참을 무작정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오른편 위쪽으로 비 그친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나온 엷은 햇빛이 산등성이의 나무를 가로질러 하늘과 맞닿아 있는 녹색 능선을 비추고 있었다. 능선을 넘으면 다소나마 안전할 것 같았다.
방향을 정한 그는 계속 벗겨지는 흰 고무신을 벗어 옷자락 가슴 속에 밀어넣고 아예 맨발로 허리를 구부리고 한참을 달렸다. 경사가 심한 산줄기에 들어서서는 듬성듬성 서 있는 소나무를 잡고 숨바꼭질하듯 건너뛰었다. 발을 옮기다가 걷어찬 큰 돌멩이 하나가 떼구르르 소리를 내면서 멈추지 않고 한참을 굴러갔지만, 다행히 낙엽이 쌓여 있어서 소리가 크지는 않았다.
[제5장 운장산, 269쪽]
눈부시도록 밝은 햇빛이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 사이로 빠져나와 나뭇잎에 부딪혀 반짝였다. 평우는 양팔을 힘껏 벌려 햇빛을 가슴에 안았다. 특수부에 끌려간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태양이었다.
아! 태양!
조국이 그렇듯이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태양!
그는 양손을 펴 이마에 올려놓고 태양을 우러러보았다. 두 눈에서는 햇빛이 깃든 붉은 눈물이 땀에 얼룩진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붉은 쟁반에 수정막을 씌운 듯 투명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소박하고, 세상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영원히 변치 않을 미소를 띠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수명대로 살 수 있도록 보살펴주는 만고의 어머니 품속 같은 태양!
그는 한동안 선 채로 부드럽고 따뜻한 햇볕을 온몸 가득히 채우고 나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5장 운장산, 270쪽]
인간은 본시 선량하고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어 하며 사람 속에 있어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의 비극에 휘말려 악인이 되고 적이 되는 모순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자료 속에서 재조명된 우리의 과거는 너무나 아프고 슬픈 역사였다. 그런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이들이 가슴 시리도록 가련했지만, 아픈 역사에 고뇌하고 갈등하면서도 결국 극복해냈고 후손들에게 희망을 준 우리의 선조들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짧은 소견으로 『태양의 그늘』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근간으로 한 비극에 그치지 않고 재심까지 다루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저력을 엿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작가의 말, 4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