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지금으로부터 육백년 전 ─ 바로 고려의 왕조가 망하고 한양에 이조가 새로 도읍하기 전 삼십여년 안팎이 되는 해였다.
황해도 배천군(黃海道白川郡)에 사는 어떤 젊은 엽사(獵師) 한 사람이 영변 묘향산(寧邊妙香山)으로 사냥을 갔었다.
짐승을 잡는 재미에 해가 가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자꾸만 심산궁곡(深山窮谷)으로 가다가 급기야 어떤 무인지경에 이르러서는 해가 아주 서산에 떨어져서 천지가 암흑하게 되었다.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운 적막한 산중에 인적(人跡)이 아주 고요하고 다만 바람소리 물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중에도 호랑이와 곰 같은 맹수가 가끔 가다가 산이 울리도록 우는데 아무리 평소에 용맹스럽던 엽사라도 무시무시하여 머리 끝이 으쓱으쓱하여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날이 저물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던 차에 엽사는 아무 곳이라도 은신할 수만 있으면 하루 밤을 자고 가려고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길을 잃은 장님 모양으로 이곳 저곳을 헤매이며 찾아 다녔다. 옛말에 절처봉생(絶處逢生)이라는 말과 같이 한 산골짜기에 다다르니 뜻밖에 오막살이 초가가 한집이 있는데 반딧불 같은 조그만 등불 빛이 나무 사이로 비치었다.
큰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마치「오아시스」나 만난것 처럼 엽사(獵師)는 하도 반가워서 만사를 제쳐 놓고 그 집을 찾아 들어가니까 그 집에는 아무도 없고 다만 처녀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그 처녀는 아주 천하 절색의 미인이었다. 엽사는 그가 귀신인지 선녀인지 알지 못하여 정신없이 한참 보다가 겨우 입을 열어 자기의 내력과 날이 어둡고 저물어서 할 수없이 이곳에 찾아 왔으니 하룻밤만 자고 가기를 간청하니 그 처녀는 쾌히 승락하고 방안으로 맞아 들이었다.
엽사는 몸이 피곤하고 배가 고픈 중에도 그 처녀를 보니 마음이 자연 유쾌하여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에도 그 처녀가 아주 친절하게 대우를 하고 또 산채수육(山采獸肉)을 겸비한 저녁밥을 잘 차려 주는 데는 더욱 감사하게 생각 하였다.
그러나 엽사(獵師)는 그 처녀가 어떠한 사람의 딸이고 또 무슨 이유로 이 깊은 산속에 와있는지도 알지 못하여 퍽 궁금하였다.
두 서너번 말을 건네어서 그의 집안의 내력과 신분을 물어도 그는 자세한 대답을 하지않고 다만 차차 알 수가 있다고 하며 앵도같이 어여쁜 입술을 방끗 방끗 하며 웃을 뿐이었다.
그럭 저럭 하는 동안에 밤은 벌써 깊어서 열두시쯤이나 되었다.
문 밖에서 인적소리가 나더니 어떤 사람이 낑소리를 지르며
『애기야 ─ 잘 있었니 ─ 오늘은 사냥을 잘 하여 한짐 지고 왔다.』
고 말하였다.
엽사(獵師)는 그가 그 처녀의 아버지이고 또 자기와 같은 엽사인 것을 짐작하였다. 그러나 크게 놀라운 일은 그 사람의 키가 어찌나 큰지 이 세상에서는 꿈에도 한번 보지 못하는 키가 큰 사람이었다. 몸집이 마치 큰 깍지통 같아서 허리가 집 처마에 닿고 머리는 지붕 위에 다아서 말하는 것이 공중에서 말하는 것 같이 들리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오는데도 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옆으로 기어 들어와서 억지로 방의 귀를 맞추어 다리를 펴고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