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회월(?月), 송은(松隱). 박영희(朴英熙)는 초기에는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월광으로 짠 병실」 등 탐미주의적인 시를 발표했으나, 1923년 김기진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1924년 《개벽》에 입사한 뒤로는 프로문학으로 전향했다.
1925년 카프를 창립하며 지도적인 위치를 맡아 소설과 평론을 주로 발표했다 박영희는 카프 활동 기간 동안 내ㆍ외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점차 카프 활동에 회의를 품게 된 박영희는 결국 1933년 12월 10일에 카프를 탈퇴했다. 이어 1934년 1월 2일 《동아일보》에 사설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을 발표하며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말을 남기고 카프 탈퇴를 공개 선언했다.
그 후 박영희는 1938년 7월 전향자 대회에 참가하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로 활동했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광복 후 강원도 춘천으로 낙향하여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다시 상경한 뒤 서울대학교와 국민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강사로 근무했다. 한국전쟁 발발 뒤 서울에서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종적을 알 수 없으나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