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한병도(韓秉道). 한설야(韓雪野)는 1925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단편 「그날 밤」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으나 아버지의 사망 후 1926년 만주로 이주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는 이듬해에 귀국하여 조명희, 이기영과 깊이 교우하였으며 곧 카프에 입단하였다. 이후 「프롤레타리아 예술선언」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카프 내부의 논쟁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때 비판을 받은 것을 계기로 1928년 함흥으로 내려가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는데, 「과도기」는 이 시기에 창작된 것이다
한설야는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 사건’ 당시 체포되었다 석방된 이후 다시금 작품 활동에 매진하여 첫 장편소설인 『황혼』과 『청춘기』 『귀향』 『탑』등의 장편소설들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이기영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창설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지령에 의해 위 단체가 임화 중심의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되어 주도권을 빼앗기자 월북했다.
한설야는 1947년 북조선문학총동맹 중앙위원장을 맡은 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다. 북한문학의 전범이 되는 작품을 집필해 북한 문단의 초기 활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1953년 무렵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남로당 계열 문인들의 숙청과 비판에 앞장섰으며, 그 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자신 역시 숙청되어 1962년 자강도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가 1976년 고향 함흥에서 사망했다. 김정일 정권 때 복권되었으며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