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회월(懐月), 송은(松隱). 박영희(朴英熙)는 초기에는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월광으로 짠 병실」 등 탐미주의적인 시를 발표했으나, 1923년 김기진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1924년 《개벽》에 입사한 뒤로는 프로문학으로 전향했다.
1925년 카프를 창립하며 지도적인 위치를 맡아 소설과 평론을 주로 발표했다. 같은 해 《개벽》에 발표한 평론 「신경향파의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는 무산계급문학의 필요성과 역사성을 이론적으로 규명하여 경향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초석을 다졌으며, 현실과 민중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켜 한국문학사에 리얼리즘의 전통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박영희는 이 평론에서 김기진의 「붉은 쥐」(1924), 조명희의 「땅 속으로」(1925), 이기영의 「가난한 사람들」(1925), 송영의 「늘어가는 무리」(1925) 등 일련의 작품들을 가리켜 종래의 감상적 낭만주의나 자연주의적 색채를 띤 부르주아 문학의 전통과는 다른 ‘새로운 경향의 문학’이라는 의미로 ‘신경향파문학’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문예운동의 방향 전환」(1927. 《조선지광》)에서 신경향파문학을 ‘자연생장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규정하고 이것이 장차 ‘목적의식적’인 무산자문학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박영희는 카프 활동 기간 동안 내ㆍ외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1926년 조선일보에 평론 「신흥예술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논하여 염상섭 군의 무지를 박(駁)함」으로 민족주의 진영의 대표 작가인 염상섭을 비판하였으며, 같은 해 말 김기진이 「문예시평」에서 박영희의 작품 「철야」, 「지옥순례」를 비판한 것에 반박하며 카프 내부에서도 ‘내용ㆍ형식’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때 임화 등 강경파의 가세로 박영희가 힘을 얻어 프로문학 운동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으며, 이어진 아나키즘 논쟁을 거쳐 김화산 등의 아나키스트 분파를 제명시키면서 카프가 더욱 분명한 좌익 강경 노선과 정치 투쟁을 추구하게 된 ‘제1차 방향 전환’이 일어났다.
이후 박영희는 좌ㆍ우익 항일세력이 합작하여 결성된 신간회의 활동에 참여하며 기존의 계급문학운동이 추상적인 이념 논쟁을 거듭했음을 자인하고,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는 ‘목적의식론’을 주장하며 실천적 구체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박영희의 이러한 주장은 이북만 등 젊은 카프 작가들에게 “작품행동에만 국한된 운동만으로도 무산계급해방 운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공상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1928년 ‘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신간회의 핵심 요인들이 구속되고,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이 ‘12월 테제’를 발표해 민족주의 세력과의 협력을 거부하게 되자 카프 도쿄 지부가 경성 지부의 신간회 지지 노선을 이탈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박영희는 카프 내의 주도권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주창하던 도쿄 지부의 임화, 김두용 등에게 밀려났다.
점차 카프 활동에 회의를 품게 된 박영희는 결국 1933년 12월 10일에 카프를 탈퇴했다. 이어 1934년 1월 2일 《동아일보》에 사설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을 발표하며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말을 남기고 카프 탈퇴를 공개 선언했다.
그 후 박영희는 1938년 7월 전향자 대회에 참가하며 친일 활동을 시작,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로 활동했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광복 후 강원도 춘천으로 낙향하여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다시 상경한 뒤 서울대학교와 국민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강사로 근무했다. 한국전쟁 발발 뒤 서울에서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종적을 알 수 없으나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