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은 도쿄 유학 시절에 사회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뒤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귀국하여 프롤레타리아문학을 제창하고 문학운동에 앞장섰다. 1924년에는 박영희, 이상화, 김복진 등과 함께 좌익예술단체인 파스큘라를 결성했고, 1925년 염군사와 제휴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창립했다.
1926년 조선공산당 기관지인 《조선지광》에 발표한 「문예시평」에서 김기진은 박영희의 작품 「철야」, 「지옥순례」를 두고 “소설이란 하나의 건축이다. 기둥도 서까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입혀 놓은 건축이 있는가.” 하는 〈소설건축론〉을 근거로 하여 소설의 형식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계급의식을 선전·선동하는 내용에만 치우침을 비판했다. 그러자 박영희는 투쟁기에 완전한 프로문학을 생각한다는 것은 아직 이르며(〈시기상조론〉), 문학은 완전한 건물이 아닌 건축의 한 부분(〈문학치륜설〉)이라는 내용의 반박을 발표했다. 이후 카프의 내분을 우려하여 김기진이 사죄의 내용을 담은 글을 발표함으로써 프로문학 운동의 주도권은 박영희가 쥐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카프문학의 정치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이 사건을 ‘내용·형식 논쟁’이라 하며, 근대비평사에서 문학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최초의 논의로 일컬어진다. 이후로도 김기진은 노동자․농민이 읽기 쉬운 통속소설 수준으로 작품을 대중화하자는 〈대중화론〉을 주장하여 임화 등 젊은 카프 극좌파와 ‘예술대중화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김기진은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 사건’과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 사건’ 때 모두 검거되었고, 1935년 6월 그가 카프의 문학부 책임자로 임화와 함께 카프 해산계에 서명ㆍ날인함으로써 카프는 10년 활동의 막을 내렸다.
1938년 이후 김기진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회부장,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설립된 조선문인보국회의 상무이사 등을 역임하며 언론인과 문인 양 방면에서 친일 행적을 보였다. 이로 인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체포되었으며 인민재판에서 즉결처분을 받았으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생환했다. 이후 대구에서 종군작가로 입대하여 1953년까지 전선문학에 해당하는 글을 썼고, 1954년 『통일천하』, 1955년 『군웅』, 1964년 『성군』 등의 역사소설을 신문에 연재했다.
사망 후 4년 뒤인 1989년 『김팔봉문학전집』(전7권)이 발간되었으며 같은 해 《한국일보》가 주관하는 ‘팔봉비평문학상’이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