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가 펼쳐 보이는 무한한 가능 세계
상상할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이야기
오늘의작가상, 김유정문학상 수상 작가 구병모 신작 소설집
2022 김유정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
「니니코라치우푼타」 수록
구병모의 신작 소설집 『있을 법한 모든 것』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환상으로 구현된 낯선 세계부터 이미지와 사유로 직조된 추상 세계, 우리가 단단히 발 딛고 살아가는 실재 세계까지, 소설이란 형식에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이야기로 우리의 감각을 일깨워온 구병모. 『단 하나의 문장』 『파과』 『네 이웃의 식탁』 『상아의 문으로』 『바늘과 가죽의 시』 등으로 증명했듯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작가일 그의 소설집 『있을 법한 모든 것』에는 제목처럼 그가 펼쳐 보이는 무한한 가능 세계가 담겨 있다. 어쩌면 우리도 한 번쯤 상상해보았을, 혹은 우리는 상상도 못했던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언젠가 구병모가 평생 써온 책을 단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면 그 책에 바로 이와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이토록 야심만만한 제목을 붙일 정도로 『있을 법한 모든 것』에는 오늘의 구병모가 지닌 작품세계가 집약되어 있다.
“이런 세상인데 무슨 일이든
못 일어나겠느냐고요. 안 그렇습니까?
이 책의 문을 여는 첫 소설은 「니니코라치우푼타」이다. 김유정문학상과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을 동시에 수상할 정도로 이미 평단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소설은 중위 연령이 61세에 달하는 초고령 사회가 되어 노인 돌봄 비용이 사회적 문제가 된 근미래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 요양원에서 남은 생을 보내는 노인들. 특수분장사로 일하는 화자는 자신의 딸도 못 알아볼 정도로 심각한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에게서 어린 시절 만났던 외계인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길고도 이상한 이름을 가진 외계인은 정말 실재하는 것일까? 미스터리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조금씩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우리 사회 이면의 모습을 비추며 동시에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는 놀라운 작품이다.
「노커」에는 자신의 얼굴을 본 사람은 언어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어버리는 ‘노커knocker’라는 불가사의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자신과 부딪치고 사과도 없이 떠나버린 누군가를 쫓아가 그의 얼굴을 확인한 ‘다정’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충격에 휩싸여 말은 물론 글을 쓰는 일과 의미를 전달하는 제스처를 포함해 그 어떤 언어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언어를 상실한 피해자들이 늘어가자 사회의 기초 시스템은 붕괴될 위기에 처하고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치명적인 재난 상황을 속도감 있고 생생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단지 재난의 상황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소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말이 언제 소통의 도구이긴 했던가? 우리는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며 말은 이해보다는 오히려 오해의 도구가 아니었나? 아무에게 돌을 던지거나 아무의 목을 매달아 까마귀밥으로 걸어놓는 무기의 일종이며, 특히 현란한 말이야말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입속의 혀처럼 부리다 그 가치와 흥미를 상실했다고 판단하는 즉시 도륙내기를 일삼던 독재자들의 필수 재능 아닌가?
_「노커」에서
「있을 법한 모든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이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가능 세계에 대해 모색하는 이야기이다. 로맨스 소설을 의뢰받은 소설가 C는 그날 밤 잠에 들어 꿈속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으로 진행되는 영화를 보게 된다. 그러나 결말은 보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나고, 그는 그 이야기가 언젠가 어디서 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떠올린 것인지 찾아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라 단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있을 법한 모든’ 결말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하고, 그것은 가능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로 나아간다.
이렇듯 구병모는 낯선 존재, 낯선 공간, 낯선 세계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을 펼쳐 보인다. 「에너지를 절약하는 법」에서는 1980년대 고도 성장기를 지나 현대에 이른 화자의 회고를 통해 가부장제 시스템 하에서 가족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있으며, 「Q의 진혼」은 발신된 메시지가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공간을 추상적 이미지로 구현한다. 메시지가 도달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1’은 디지털 코드화되어 의미의 구천을 떠돌고, 의미와 무의미가 혼재하는 양자의 세계는 구병모의 독창적이고 섬세한 언어에 의해 경이롭게 가시화된다.
「이동과 정동」은 반복되는 전염병으로 황폐화되어 이동이 특권층의 전유물이 된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다. 트럭 운전사인 ‘얼’은 동료 운전사인 ‘샤드’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아 그의 행적을 조사하던 중, 그의 실종에는 명상을 통해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영성주의자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얼의 이야기를 통해 경계를 넘는 이동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 막…… 당신이 말했네요.
—뭐요?
—이런 세상이니까 무슨 일이든 못 일어나겠느냐고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면, 인간의 힘으로 저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 없겠지요.
_「이동과 정동」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을 법한 어떤 것과
있을 법한 모든 것 사이의 어디쯤에 당신이
촉발되고 솟아오르고 흘러넘치고 울려퍼지고 자리잡으니.”
구병모는 2008년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해 베스트셀러가 된 『위저드 베이커리』로 우리 앞에 등장해 늘 자신을 갱신하며 우리에게 낯설고도 놀라운 문학적 경험을 선물해온 작가다. 『파과』와 『네 이웃의 식탁』 등 장편으로 큰 사랑을 받아온 작가지만, 그가 밀도 높은 언어로 그려내는 강렬한 이미지와 다층적인 사유는 단편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단지 상상에 그칠 수 있는 발상을 독창적이고 거침없는 언어를 통해 총천연색의 이야기로 구현해내는 구병모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무대가 바로 그의 소설집인 것이다. 그러나 구병모 소설의 미덕이 비단 다채로운 이야기를 빚어내는 탁월한 상상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려내는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우리를 즐거이 사로잡음과 동시에 마치 동경(銅鏡)처럼 우리 세계의 이면을 서늘하게 비춘다. 그걸 가능케 하는 그의 날카로운 현실 감각은 어쩌면 구병모가 소설가로서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있을 법한 모든 것』을 읽으며 낯선 존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라는 낯선 존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이고, 구병모를 읽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