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었다가 이내 영혼이었다가
깜빡깜빡하는 혼란 속에서”
그늘진 땅속 서로의 손을 붙들고서
신비하고 이채롭게 자라나는 눈물, 귀신, 버섯
감각적이고 새로운 목소리의 시인들을 소개하며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문학동네시인선이 200번을 앞두고 199번으로 한연희 시인의 두번째 시집 『희귀종 눈물귀신버섯』을 선보인다. 2016년 창비신인문학상을 통해 “시를 전개하는 방식이 능란”하고 “일상의 친근한 사물과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데서 시적 “기반이 탄탄함”을 알 수 있다는 평(심사위원 박성우 박소란 송종원 진은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첫 시집 『폭설이었다 그다음은』(아침달, 2020)에서 매 순간 우리를 틀에 가두고 교정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비뚤어지고 정체를 알 수 없어 아름다운 화자를 앞세워 끊임없는 폭설이 쏟아지는 종말론적 세계 속에서 절망하는 대신 사랑의 힘으로 지지 않고 걸어나갈 것을 다짐한 바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좀더 어둡고 축축한 곳, 빛이 들지 않아 외면받기 쉬운 곳으로 눈길을 돌려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기묘한 존재들을 들여다본다. “저 혼자 자라나” “귀신처럼 들러붙은” “이상한 유기체 같”(한연희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에서)은 이 존재들은 때로는 ‘기계 속 유령’과 ‘계곡 속 원한’으로, 때로는 “잿물과 산비둘기의 피로 이루어진 비누”(「비누의 탄생」)로 몸을 바꿔가며 신비롭고 발랄한 목소리로 서늘하고도 서글픈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끝이 난 시점
거기엔
경계선이 있고
넘어서기에 딱 좋고
축축해진 손을 흙에 묻었더니
금세 와글와글한 이야기가 자라났다
(…)
손……님……
서두를 부탁드려요
주렁주렁 열린 손을 뽑는다
이 이야기가
부디
아무나 꽉 잡아주기를
_「손고사리의 손」에서
왜그랬어왜그랬어왜그랬어왜그랬어
어떤 응어리가 데구루루 굴러간다
(…)
개는 죽으면 영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고
인간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빨간 실타래와 부적을 베개 밑에서 꺼내
가스불에 태우고 나서야
선명하게 보인다
드디어 찾았다
내가 발뻗고 죽을 자리!
_「광기 아니면 도루묵」에서
“끝이 난 시점”(「손고사리의 손」)에 경계선을 넘어서서 ‘영혼’ ‘귀신’ ‘유령’이 되기를 택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응어리”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빨간 실타래와 부적을 베개 밑에서 꺼내/ 가스불에 태우고”(「광기 아니면 도루묵」)서도 풀 수 없는, 이들로 하여금 지박령이 되어 영원히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이 응어리는 무엇일까. 시집을 채우고 있는 장면들은 하나같이 무참하다. ‘나’의 사랑하는 언니는 자신이 다친 것도, 자신에게 갓난아이가 있는 것도 까먹다 영혼마저 까먹어버린 채 창밖으로 떨어진다(「고딕 모자」). 이웃집 아저씨가 낚아챘던 여자애의 손목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비린내가 나고(「알루미늄」), 또다른 여자애는 물에 빠져 죽임을 당하며(「굴 소녀 컴백 홈」), 피서객들이 노니는 캠핑장 인근에는 누군가의 피 묻은 옷더미와 구더기가 있다(「캠핑장에서 왼쪽」). 이토록 “무책임한 군중 무차별적 폭력 무의미한 처벌”(「굴 소녀 컴백 홈」)뿐인 세상에서 ‘끝’을 맞이한 이들은 “썩지 않는 몸과 뒤섞인 몸의 사체를// 걷어버리면/ 세상에 태어난 흔적도 없어져버”(「미드웨이섬」)리므로 수습되지 못한 채 부패해갈 뿐 제대로 된 애도를 받을 수 없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말 못한 사연”은 썩어들어가며 “끈적하게 상처에 달라붙”(「딸기해방전선」)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토록 참혹한 사연으로 인해 원혼이 되어버린 존재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의 한을 풀어내기는커녕 이야기를 시작할 수조차 없다. 그들에게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자에게는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으므로, 그들은 ‘손님’, 즉 샤먼의 힘을 빌려야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바로 이 샤먼의 역할로서 이 세계에 초대받은 인물이 한연희의 화자이다. 그는 “인간이었다가 이내 영혼이었다가 깜빡깜빡하는/ 혼란 속에서”(「12월」) 방울 달린 천조각을 흔들면서, 버림받고 상처 입은 존재들이 자신의 못다 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도록, 그들 각각의 존재가 ‘희귀종’으로 호명되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이름을 찾고 또 찾는다.
누군가를 부르기에 적당할 때까지
누군가의 형체가 만들어지기까지
이름을 만든다
온 자와
간 자의 이름은 늘 다르다
(…)
희고 둥그런 기계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의 이름은 에밀리
_「에밀리 껴안기」에서
여전히 아이들은 이른 죽음을 맞이하고
가볍고 작고 흰 손가락이 그렇게 무참히 얼어붙고 있는데
그러니 12월에는
뜨거운 통 안에서 퍼올린 이름들을 불러줘야 해
이 끈질긴 애정으로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무슨 이야기든 듣고 말해야 한다
_「12월」에서
무지개를 건너간 반려동물 나의 친구 언제나 자매 카레의 여왕 다정한 이웃 혹은 선생님 저 먼 인도의 수많은 신의 부름을 물려받은 자 그리고 내가 식탁에 마주앉아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든지 네 편이 되어주기로 약속할게
_「어제의 카레」에서
그렇게 ‘영혼’ ‘귀신’ ‘유령’이 “나의 친구 언제나 자매 카레의 여왕 다정한 이웃” 혹은 “에밀리”가 될 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든지 네 편이 되어주기로 약속”하며 서로의 죽음을 기억하고 존재를 증언하기 시작할 때, ‘눈물’ ‘귀신’ ‘버섯’은 한데 모여 ‘눈물귀신버섯’이라는 희귀하고 새로운 버섯의 이름을 얻는다. 불가해한 메아리와 섬뜩한 흐느낌은 이야기로 자라나 마주앉은 식탁은 어느새 와글와글한 이야기들로 시끌벅적해진다.
기억해야 합니다
진실을 파헤쳐야 합니다
꾹꾹 적어나갈 수 있는 연필을
언니가 손에 쥔다
엄마가 이름을 쓴다
이모가 일기를 끝마친다
딸이 필통 가득히 연필을 모은다
그렇게
씨가 나무로 나무가 연필로 연필이 진실로
이어지고 이어지는 세계에서는
작고 여린 씨앗이 되는 것이
두렵지 않을 거야
무궁무진한 다음을 기다릴 거야
_「씨, 자두, 나무토막 그리고 다시」에서
한연희의 화자는 말한다. “우리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금세 사라질 거라고 다들 말했지만”(「하이볼 팀플레이」), 이야기의 손이 끝끝내 우리를 꽉 잡아줄 것이라고. 사라지게 두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무궁무진한 다음”이 기다리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여자애는 무럭무럭 어른이 되”고, “비좁고 어두운 동굴을” 막 빠져나온 자리에서 우리는 마침내 “모두 나이 많은 여자”(「표고버섯 키트」)가 되어 있는 서로를 무사히 마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