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등지고 삐죽이 솟은 노루봉이 어느새 단풍으로 칠갑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원히 계속될 듯 여름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이미 세상은 붉은 가을이었다. 곧 눈이 내리겠지. 한 인간이 죽는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계절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해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그 빈자리는 곧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는 법이다. 내 자리 또한 잠시 후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듯이. 하지만 시각을 조금 틀어 살펴보면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 내가 십 년 전 가을에 바라보던 노루봉의 저 핏빛 단풍은 지금과 같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금 붉게 물든 저 단풍은 단지 예닐곱 달 전에 수줍은 얼굴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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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학창시절 우리 고전문학을 처음 접하며 느낀 감동과 충격이 문학을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향신문 신춘문예 동화 「참새풀」과 문화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구스타프 김」으로 등단. 우주와 신화, 장구한 지구의 역사에 관심이 깊다. 작품집으로 장편소설 『시간의 이면에서』, 창작 아동소설 야미도 이야기 『불새』가 있다. 공직 정년 후 예쁜 도시 군산에 정착해 창작활동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