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구겨진 뒤축 같은 오늘을 딛고
끝내 내일이라는 약속을 지켜내는 이십대의 초상
체념과 무기력만 남은 듯한 세상에 희망이라는 농담을 던지며 자신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는 청년 세대를 그리는 시인, 고선경의 첫번째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문학동네시인선 202번으로 출간한다.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할 당시 이문재, 정끝별 시인으로부터 넘치는 “시적 패기”로 써나갈 시의 힘이 기대된다는 평을 받은 시인은, 이십대의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냄과 동시에 수상 소감에서 밝혔듯 “무궁무진하고 이상한 미래”로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시편들을 선보여왔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오래된 테이프를 재생하듯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 요소들을 배치해 읽는 이를 공감과 향수로 가득한 시세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딴청과도 같은 회상이 끝나고 돌아온 현재는 그러나 지고 또 지는 게임의 연속이다. 시인은 자조적이면서도 능청스러운 유머로 청년들의 고단한 현실을 비틀고, 미지의 내일에 향기롭고 경쾌한 상상을 덧입힌다. 너머를 상상할 수 있기에 앞으로를 다짐하고, 사랑을 약속하며, 끝없는 소망을 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편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꿈꿈으로써 또 한번 오늘을 살아내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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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교환일기는 늦여름 더위를 먹고 다 타버렸지
심야 산책중 주운 나뭇잎들과 너의 깨진 안경알 잡동사니 불길한 애정 모든 게 따분해졌는지 몰라 선풍기가 고장난 빈 교실에서 있었던 일 기억해? 그날의 일기에는 귀여운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여두었잖아 너의 펜촉은 유창한 주삿바늘이었어 알록달록한 감정들을 주입했지 통통하게 부푼 마음을 찔릴 때마다 나는 향기로워졌어
_「유통기한이 지난 약은 약국에 버려주시면 됩니다」에서
고선경의 시들은 교환일기를 쓰고 무한궤도와 패닉, 다프트 펑크를 듣던 그리운 한낮의 오후로 시간을 되돌린다. 귀엽고 감미로운 기억의 조각들은 화자와 읽는 이를 노스탤지어에 잠기게 한다. 그러나 시의 후반부에 이르러 교환일기를 쓰던 화자는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되어” 친구의 곁에 누워 있고, 부드러운 바람은 낡아가며 빗방울에는 녹이 슨다. 커져가던 회상을 과감히 떠나보내고 화자는 현실을 인식한다. 그리고 빚 생각에 잠 못 이루는 이십대 청년으로 돌아와 중국집 주방에서 설거지를 시작한다.
소셜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젊음의 모습은 고선경의 시에 없다. 필터 없는 카메라와 에코 없는 마이크처럼 고선경의 시는 날것 그대로의 화소로 어딘가 어설픈 청년의 일상을 포착한다. 그런데 해고를 당해도, 시가 팔리지 않아도 고선경의 화자는 섣불리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조적인 유머로 상황을 비틀고 자신의 처지를 재차 환기한다. 자기를 연민하지 않으면서 현실의 무게를 정확히 대면하는 패기가 고선경의 시편 곳곳에 어려 있다.
아르바이트를 잘리고 가게를 나서기 전
얼음물 좀 마셔도 되겠습니까 물었다
물을 마시면서
세상에는 야무지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겁니다
쯧, 훈수를 둔 뒤 사장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
밤이
방까지 몰고 온 안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나는 빚이 있단 말이야 바보야 빚은
푹신푹신하다
_「알프스산맥에 중국집 차리기」에서
조금만 견디면 더 나은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이 시대의 청년들은 어떻게 현재를 견뎌내고 있을까. 고선경은 무궁무진한 상상을 덧입혀 눈앞의 삭막한 풍경을 경쾌하게 바꿔버린다. 잠 못 이루게 만들던 빚은 베개처럼 푹신푹신해지고, 도시는 색색의 비로 젖어들며, 비탈에는 빨간 토마토가 데굴데굴 굴러간다. 이러한 풍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고민은 떠나가고 마음은 가뿐해진다. 비록 실패가 예정되어 있더라도 상상이라는 해방구를 열어두는 자세에서 시대가 아닌 자신을 믿고 다독이는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고선경의 핍진한 시선과 발랄한 상상력은 사랑을 말하는 시편들에서 혼합되며 독특한 반전을 만들어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일 때, 운동화의 구겨진 뒤축은 웃는 표정으로 바뀌어 보인다. 소다수의 기포처럼 연약하고 유한한 것들은 단단해지고 무한해진다. 이제 세상은 그 자체로 견고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현관에 놓인 신발의 구겨진 뒤축이 웃는 표정을 닮았어 너는 침대에 누워 있고 바람이 많이 부는 청보리밭에 가고 싶다 멸종된 기억을 가지고 싶다 너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릴 때 나는 사라진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아침의 어둠이 이젠 익숙해
그래도 같이 씻을까
산책을 갈까
세상에서 가장 느린 산책로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_「샤워젤과 소다수」에서
시인 고선경의 재능은 이렇듯 쓰러진 풍경 너머를 상상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때 빛을 발한다. 체념과 무기력에 잠식당하기 쉬운 지금, 이제 막 세상으로 나온 고선경의 문장들은 “우리 여기 남아 삶을 더 지속해보자”(해설)고 선언하는 것만 같다. 삶의 무게를 떨쳐내고 미지의 세계로 첫발을 내디딘 청년의 초상이 『샤워젤과 소다수』의 사랑스러운 향기를 따라 그려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