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이다.
내가 오로지 너를 생각하며 이 소설을 썼으니까.”
_‘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영원히 헤어지지 못할 이름이 된 소년, 앨리시어
『야만적인 앨리스씨』 출간 10주년 개정판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깊은 매혹을 불러일으키며 그 자체 좋은 소설의 새로운 기준이 된 황정은 작가의 두번째 장편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상투성으로부터 멀어지는 힘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히 쌓여 완성되는 그의 작품은 여러 번 읽을수록 풍성해지는 의미의 겹을 즐거이 헤매는 기쁨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직관적으로 귀에 달라붙는 노래처럼 특유의 감각과 리듬으로 우리를 휘감아왔다.
지금으로부터 꼬박 십 년 전, 이 작품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선보일 당시 황정은은 이제 막 두 권의 소설집과 첫 장편소설을 출간한 젊은 작가였다. 「오뚝이와 지빠귀」(『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2007)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천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대니 드비토」(『파씨의 입문』, 2012)처럼 작품에 흐르는 아름답고 쓸쓸한 서정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百의 그림자』(2010) 속 인물들이 자아내는 아슬아슬하면서 단단한 온기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듯 촘촘한 폭력에 속절없이 노출된 ‘앨리시어 형제’의 모습은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2014)와 소설집『아무도 아닌』(2016) 『디디의 우산』(2019) 등을 읽고 난 지금의 우리에게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그후 펼쳐질 황정은 소설세계의 또다른 방향을 선명히 예고하는 작품으로도 다가온다. 그러니까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부서져가고 있다는 또렷한 실감 속에서 그 세계와 어떤 식으로든 긴밀히 연루될 수밖에 없는 당사자이자 목격자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작품으로.
“앨리시어가 이야기를 해줄까.
여기 이 모퉁이에서.”
작품이 출간되었을 당시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한 채널을 통해 “훌륭한 소설들이 대개 그렇듯, 『야만적인 앨리스씨』 역시 그렇게 길게 메아리쳐 울리는 필사적인 질문 하나를 던지고 끝난다”라고 언급하며 작품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고, 2018년 일본 출판사 가와데쇼보신샤에서 출간된 번역본은 “독자의 일상을 흔드는 무서운 소설이다”라는 호평을 얻기도 했다. 일상의 흔들림, 그것은 아마 세계가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감각과 연관돼 있을 것이다.
‘內’와 ‘外’, 그리고 ‘再, 外’ 총 3부로 구성된 소설은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고모리’에 살던 10대 소년의 앨리시어는 소중하고 결정적인 무언가를 잃은 뒤 여장 부랑자가 되어 사거리에 서 있다. 그는 무엇을 잃었고 왜 잃게 된 걸까. 앨리시어가 나고 자란 고모리는 지명의 유래가 무덤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환한 낮의 공간보다는 축축하고 어두운 밤의 공간처럼 여겨진다. 빠져나가기 위해 두 발로 오르고 네 발로 올라보아도 사방이 꽉 막혀 있는 탓에 다시 안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 공간 안에서 앨리시어 형제는 어머니가 가하는 폭력을 고스란히 당하며 살고 있다.
그럴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된다. 달군 강철처럼 뜨겁고 강해져 주변의 온도마저 바꾼다. 씨발됨이다. 지속되고 가속되는 동안 맥락도 증발되는, 그건 그냥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다.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이 그 씨발됨에 노출된다. 앨리시어의 아버지도 고모리의 이웃들도 그것을 안다. 알기 때문에 모르고 싶어하고 모르고 싶어하기 때문에 결국은 모른다.(49쪽)
아버지와 이웃의 방관 속에서 어머니의 ‘씨발됨’, 그러니깐 “때리니까 때리고 싶고 때리고 싶으니까 가속적으로 때”(50쪽)리는 일상적이고 무심한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앨리시어 형제는 아버지의 전처가 낳은 형과 누나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도 하고 상담센터를 찾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거의 무응답에 가까운 반응만이 되돌아오는 그 과정 속에서 앨리시어 형제가 품고 있던 자그마한 희망은 서서히 깎여나간다.
그럴 때 그들에게 한줌 위안이 되는 것이 ‘이야기’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씨발, 이라고 자꾸 들으면 씨발, 이 된다는 거. (…) 말하면서 자기 말 듣게 되잖아, 씨발 씨발, 하고”(43쪽)라는 앨리시어의 말에 귀기울여본다면, “형. 나 얘기 하나만 해주라”라는 동생의 말에 앨리시어가 ‘네꼬’ ‘여우’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는 건 동생에게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씨발’ 이외의 다른 말을 들려주려는 노력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거리에 서 있는 여장 부랑자 앨리시어를 본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잃고 말았을 때 느끼는 깊은 죄책감과 책임감, 그리고 슬픔 속에서 앨리시어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은 이것이 도저히 끝낼 수 없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500매 남짓한 이 길지 않은 소설을 읽는 일에 전심을 다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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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꿈을 반복해 꾼다. 캄캄한 방에 불을 켜려고 애쓰는 꿈이다. 어두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누르지만 불은 들어오지 않는다. 불을 켜려고 애쓰면서 나는 이게 꿈이고 죽음이고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한다기보다는 그걸 그냥 안다. 이 방은 이대로 어두울 것이고 나는 여기 남을 것이다. 그렇게 겁에 질려 부질없이 불을 켜려고 애쓰는 꿈을 나는 오래전부터 반복해 꾸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꿈을 말하고 다녔다. 꿈이라고 말하면 덜 두려울 것이고 그래야 거기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앨리스씨 이야기도 그래서 썼다.
너는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이다.
내가 오로지 너를 생각하며 이 소설을 썼으니까.
_‘개정판 작가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