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번도 너 같은 종류의 가만히는 원한 적 없어.
나 혼자만으로 충분한 가만히 동호회.”
순진하고 귀여운 표정 아래 숨겨진,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크고 단단한 힘
변윤제 첫 시집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 출간!
문학동네시인선 205번으로 변윤제 시인의 첫 시집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를 펴낸다. 2021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변윤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음매 없이 아우르는 시의 확장성”과 “발랄한 상상력” “말들의 좌충우돌이 빚어내는 시적 활기”(시인 김언희)가 괄목했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여 동안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친 시인이 발표한 시 38편을 엮는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번 시집 중 1부의 부제는 ‘They’이다. 「음악의 편리와 료칸의 별」에서 “너와 있을 땐 불행의 편이고 싶다”라고 말하는 시인은 “어딘가에서 울고 있”는 너를 통해 “한 명이 아니라 무수한 사람의 발소리”를 듣는 귀를 지닌 자이다. ‘나’가 아니라 ‘너’를, ‘자아’가 아니라 ‘타자’를, “위로하는 나”가 아니라 “누구를 보살피느라 위로 자신을 돌보지 못한” “위로”(「게스트 하우스에서의 한 달」) 그 자체를 헤아리는 시인의 시선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대신 주변 상황과 바깥세상을 향해 있다. “시가 사람의 일, 삶의 일임을, 자기 몰두를 넘어 현실과 타자에 깊숙이 연루되는 일임을”(김언희) 보여준다는 심사평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인도에서 온 케밥 판매원 “아디타”(「체류자들」), “끔찍함이라는 단어를 번역 못하는 언어”에 대해 생각하는 “번역가 친구”(「것들」), 민박집을 운영하는 “친절한 노부부”(「인도식 키친―눈물이 마음으로부터 눈으로 나온다면, 모든 물은 아래로 흐르는데 왜 유독 눈물만은 그렇지 않은가」) 등은 모두 ‘타자(They)’이지만, 시인은 그들이 살아내는 고된 하루하루를 살피면서 이들의 “매일이 선물이 아니”(「내일의 신년, 오늘의 베스트」)라 할지라도 “우린 노을빛을 스스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적당히 우스워지며 실패를 사로잡는 법”(같은 시)을 터득한 시인은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라고 능청스럽게 의지를 다잡으면서 읽는 이에게도 삶을 살아낼 힘을 전해준다.
이 동물은 햇살을 담기 위해 길러집니다. 그 속엔 거울이 있고, 고원이 있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다시 바라보면.
안개 속입니다. 안데스 고원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알파카. 흉곽에 구름을 충전하고 싶습니다. 손금이 달라질 때마다.
(……)
몽실한 머리를 보세요. 귀여움이고, 그러니 잔인함이고.
블랙홀을 예수라 믿으며 자신을 파고든 사람들처럼.
소용돌이칩니다. 사라지지 마세요. 모두 다 우연이니까.
알파카의 털 속으로 파도가 치고. 복슬복슬 물살을 들이마시면.
이 거짓말은 전부 겪은 일입니다. 눈 뜨면 변기 위에서의 주절주절. 커피숍에서 안데스 고원으로. 새로워지라니 참 진부한 얘기였군요. 다시 눈 뜨면 으악으악.
_「알파카의 세계」 부분
한편, 2부 ‘알파카 공동체’는 ‘아웃 복서 알파카 양’ ‘주식회사 알파카 건설의 직원’ ‘대필 작가 알파카’ 등 다양한 ‘알파카’가 등장하는 연작시이다. “몽실한 머리”를 지닌 알파카는 언뜻 귀여워 보이지만, 시인은 알파카에게서 “잔인함”(「알파카의 세계」)을 발견한다. 알파카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오해가 산사태를” 만드는 위태롭고 부조리한 “안데스의 꼭대기”(「못된 알파카 친구들에게」)이고, “연민은 나를 싫어”(「우리의 명랑한 얼룩무늬」)하는 비정한 세상이며, “보이는 것만 믿고 있”는 “모두가 사이비 종교”(「알파카 공동체」)인 무대인 것이다. 특유의 명랑한 어조로 진행되는 알파카 연작시에서 독특한 비애감과 날 선 비판의식으로 인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이러한 시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알파카’는 어떤 의미일까? 문학평론가 최선교는 해설에서 ‘알파카’를 “의미가 발생하기 직전의 무의미한 기표 상태”라고 해석한다. ‘알파카’는 구체적인 외양을 지녔음에도 의미를 유추하기 어려운, 마치 의미가 담기지 않은 듯한 텅 빈 기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알파카’는 역설적으로 모든 의미가 될 수 있다.
슬픔이나 절망은 시인의 전유물이 아니지만, 시인은 시인의 방식으로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찾는다. 언어는 시인의 방식이며 변윤제는 바로 그 방식을 사유함으로써 존재를 가두는 모든 종류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2부의 부제인 ‘알파카 공동체’가 한 마리의 알파카(단수)로 완성될 수 없듯이, ‘알파카’라는 기표가 단 하나의 의미로 예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최대한 다양한 방식으로 읽으려는 독해가 요청된다. 읽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의미가 개입할 때 비로소 시가 아름다워지듯이, ‘공동체’라는 말이 암시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연대가 완성되는 방식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변윤제는 ‘알파카’라는 텅 빈 장소를 제공하며 반드시 한 명분 이상의 몫이 개입될 때만 비로소 완성되는 시적인 정치성, 정치적인 시성(詩性)을 그려내는 것이다. _최선교(문학평론가), 해설에서
3부 ‘변연계―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내밀한 자기고백적인 시들로 채워져 있다. “대학 병원에 혼자” 있으면서 “아픈 사람보다 평범한 것”(「평범한 일 1」)에 눈길을 주는 시적 화자는 “일기 속 상처는 특권이지만,/ 역시 평범한 일”이라고, “절망 이후에 기어코 다정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평범한 일”(「평범한 일 2」)이라고 여기면서 스스로의 고통을 과장하지 않는다. “신보단 나를 잘 그리는”(「자화상」) 화자는 “위력이 넘치는 세상”(「평범한 일 3」)에서도 “삶이 아름답다는 오래된 믿음을 소중히” 여기면서 “제외된 삶의 이파리를 바라”(「평범한 일 4」)본다. 이와 같은 시편들에서 고립을 자처하지 않고 주위를 부지런히 살피면서 자기긍정성을 발견해내려는 이의 고요한 안간힘이 아름답게 넘실거린다.
볼 수 없다는 건
어두운 까닭이 아니라
마음이 마음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란 걸 알아버리는
그런,
평범한 날
사람에 실망했으므로
나는 더욱 사랑스러울 것이지
_「평범한 일 3」 부분
“무거운 문제들을 자연스러운 어투로 다루는 솜씨,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특한 상상력, 한 톨의 억지 없이 순식간에 세계를 넓게 확장해 현실을 ‘새로이’ 보게 하는”(시인 박연준) 변윤제의 개성은 4부 ‘Make Your Death’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진다. “빠져버리자 머리머리/ 머저리들아”라며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미움”에 신랄한 유머로 맞서는 「탈모 예방법」, “쑥 하고 들어가는 칼끝”처럼 번뜩이는 감각을 드러내는 「수박 만드는 사람」, 애틋한 그리움을 담아 존재론적인 질문을 특유의 경쾌한 어조로 건네는 「한때 우리집 고양이와」, 민트초코 유행을 따라 라면에 치약을 넣고 끓이다가 “자꾸 그렇게 곁눈질하지 말아요/ 세상에 대한 안목이 생겨버릴 것 같잖아요?”라며 “참신하다는 말”이 도리어 “모욕”이 된 세태를 풍자하는 듯한 「민트초코가 유행이라서」 등이 실려 있다.
가만히 멈춰라.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시작된 동호회.
(……)
나는 한 번도 너 같은 종류의 가만히는 원한 적 없어. 나 혼자만으로 충분한 가만히 동호회.
가만히 부르는 순간 가만히 있던 그림자가 떨어져나가고.
제 털을 가만히 기르던 먼지떨이가 부서져버리고.
벽에 가만히 스며들고 있던 제 등이 제 척추에서 떨어져나가서.
사방이 저로 가득한.
동호회라기보다는 가만히 의회에 가까워집니다. 가만히로 구성된 제국일지도 모릅니다. 가만히. 가만히 다가오는 비명에 대해.
(……)
그대여.
가만히 멈추라고요?
가만히야.
나는 나의 가만히를 끌어안습니다.
가만히의 기다란 코가 내 목을 살며시 조릅니다.
아, 가만히.
그리하여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가만히 동호회.
_「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가만히 동호회」 부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가만히 동호회」는 시인의 데뷔작으로, “시 아니고서는 다른 말로 표현할 길 없어 쏟아부은 에너지”(시인 박연준)가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가만히’란 “묵은 것,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구린 것, 탐욕 때문에 가려져 있던 것, 유행하는 것, 자본주의의 등잔 밑에 있는 것, 폭언과 침묵 사이를 오가는 것”(시인 오은) 등을 의미하는 말로 읽히지만, 더 나아가 한국에서 2014년을 지낸 이들에게 동일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로 다가오기도 한다.
최선교는 해설에서 ‘가만히’라는 말이 “가만히야”라는 사랑스러운 호명으로 인해 하나의 주어가 되는 순간 의미의 감옥에서 벗어나 스스로 움직인다고 짚어낸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명령, 그리고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이 발화된 2014년의 그날로 시를 해석하려는 의도조차 시는 거부하고 있다고, “삶이 언어를 초과하는 것처럼, 언어 역시 삶의 맥락에 귀속되지 않는다. 변윤제는 이 말장난 같은 삶과 언어의 관계를 통하여 삶이 말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말이 삶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한다”고 강조한다.
변윤제는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으며, 사회 부조리를 서슬 퍼런 시선으로 감지하는 믿음직한 신인이다. 우리 개인을 향한 속 깊은 위안과 이 사회를 향한 재치 있는 일갈을 번갈아 건넬 줄 아는 그의 첫 시집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는 묵은해를 보내고 맞이할 새해를 그려보게 되는 이 시기, 우리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하는 힘을 건네는 시집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