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없는 당신이
여전히 내게 머물고 있는 걸 알게 하기 위해
묻어놓고 간 것이 저 나무가 아닌가 한다”
아렴풋한 진실이 일렁일 때
그 너머로 나아가는 존재의 몸짓
우리 세계에 숨은 진실을 탐사하는
시인 10인의 시적 모험
이 시집에 수록된 시인들의 개별 작품이 지닌 독창적 목소리의 심연에는 낯선 세계를 향한 모험적 만남과 그 세계의 비의성을 탐색하는 험난한 도정을 마다하지 않는 시인의 숙명이 자리하고 있다.
_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학교 국문과 교수)
10인의 다채로운 시를 엮은 앤솔러지 『시간은 두꺼운 베일 같아서 당신을 볼 수 없지만』이 교유서가에서 출간됐다. 앤솔러지의 제목은 김안의 시 「맏물」에서 가져왔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뛰어난 문인들에게 창작지원금과 함께 출간 기회를 제공하는 경기문화재단의 사업으로 10인의 시인들이 한 시집에 모였다.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작품들을 모은 게 아니라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는 시인들의 시편을 엮으니 뚜렷한 특징 대신 독특한 모양새를 지닌 한 권의 책이 탄생했다. 권민경, 김개미, 김안, 노국희, 손택수, 윤의섭, 이유운, 이재훈, 임지은, 전영관 등 세대와 성별의 제한 없이 오로지 ‘시’로 연결된 이들이 모여 만들어낸 (불)협화음이 찬란하게 빛나는 시집이다.
낯선 세계를 향한 모험과 험난한 도정을
마다하지 않는 시인의 숙명
세계에 대한 인식에 운율을 부여한 것이 시라지만, 『시간은 두꺼운 베일 같아서 당신을 볼 수 없지만』에 실린 시들을 보면 이것이 정말 시의 본질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저마다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상상력을 더해 표현한 10인의 시 세계가 그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불빛도 보이지 않는 밤이 오면 블라인드를 내려 밑줄을 만든다 이건 한겨울에도 여름 이불을 덮은 시야 배가 차가워지지 않게 살살 문지르는 시야 방충망에 달라붙은 윙윙윙처럼 되돌아오는 시야
_임지은, 「창문으로 쓰는 여름 시」 부분
시는 일상적 사물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게 만들기도 한다. 임지은은 창문을 종이로 삼고 블라인드로 밑줄을 그어 그 위에 시를 쓴다고 표현했다.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창문과 그것을 덮은 블라인드를 활용해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처럼 일상의 소재로 통통 튀는 창의력을 발휘한 시가 있는가 하면, 본질적인 의문을 파고든 시도 있다.
심장에 상처가 새겨진 듯도 하다 가끔 아프고 가끔 무너져 내리는 것 같고 그러나 희미해지고 아물고 지워지면 그러니까 해변의 발자국이 파도에 쓸려 가면 새벽별이 아침 햇살에 녹아버리면 봉분 올린 무덤이 폭우에 가라앉으면 내게 남아 있는 상흔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면
나는 잠깐 부풀어 올랐던 거품이었다
_윤의섭, 「기억흔적」 부분
윤의섭의 시 「기억흔적」에서 심장에 새겨진 상처는 이따금 고통을 유발하며 오히려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반면, 파도에 쓸려 가는 해변의 발자국이나 아침 햇살에 녹아버리는 새벽별이나 폭우에 가라앉는 봉분 올린 무덤은 흔적 없이 사라짐으로써 삶의 유한성을 부각한다. 심장의 상흔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면 ‘나’ 역시 “잠깐 부풀어 올랐던 거품”일 뿐이라는 인식은 삶과 죽음, 인간 존재의 현존에 대한 시인의 통찰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힘껏 울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자기보다 가여운 것이 없다는 듯, 시라는 것이 물속의 말인 듯. 그러나 그에게 허락된 것은 그저 흐르지도 멈추지도 않는 물뿐이었다. 시인은 잠시 울음을 멈추고 양손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려 하는데, 도통 얼굴에서 손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무것도 흐르지 않은 탓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시인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객석의 뒤통수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_김안, 「문학 특강」 부분
수많은 사람 중에 시를 쓰는 사람은 어떤 특출난 재능을 갖고 있을까? 아니면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기라도 한 걸까? 시를 읽는 사람들은 무언가 깊은 뜻이 있겠지, 하며 파고들지만 시인은 내가 뭐라고 시를 쓰고 있나,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환멸과 시인으로 살아가는 어려움, 정직하게 시를 쓸 수 있는가에 대한 시적 화자의 고뇌는 곧 시인의 숙명일 것이다.
시인은 가려진 것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다. 가려진 저편의 것에 관심을 갖고, 호기심을 시로 바꾸어내는 사람이다. 우리의 앞을 “간밤의 폭우”(「맏물」)나 “어떤 절취선”(「무빙 이미지」)이 가로막고 있다면, 시인은 그 너머에 “흰빛을 발하는 거대한 외눈들”(「문학 특강」)이 빛나고 있을지라도 한 걸음 내딛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명백한 장면을 투명하게 지나치지”(「근린공원, 5 am」) 않고 “밤보다 더 깊고 푸르게 격렬해지는”(「문학 특강」) 사람일 것이다. 10인의 시인이 떠나는 시적 모험과 그들이 걷어낸 진실의 장막 너머를 마주하다보면 아렴풋이 지나쳤던 또다른 진실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