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문제를 숨기고 살아가는 불길한 존재들의 이야기.
우리 사회의 병리학적 현상들을 주목해 냉정한 시선과 필체로 파헤치는 작가 안보윤의 세번째 장편소설『사소한 문제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그녀는 2005년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수상작『악어떼가 나왔다』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줄곧 사회에서 발붙일 곳 없는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무방비로 노출된 폭력과 절망적인 상황 등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녀만의 독특한 소설세계를 구축해왔다. 이번 신작 장편『사소한 문제들』또한 작가가 천착해온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가정과 학교의 폭력에 내몰린 여자아이 ‘권아영’과 사회에서 이탈해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동성애자 ‘배두식’의 삶을 묶어 세상의 음지에서 몸부림치며 불행해할 수밖에 없는 불길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그녀만의 하드보일드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불행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아이들의 잔혹동화 같은 세상
소설의 첫 장면은 텅 빈 놀이터의 묘사로 시작된다. 핏물이 배어든 고무매트, 헐겁게 늘어진 그넷줄, 요새처럼 사방이 가로막힌 놀이터 일층의 빈 공간. 놀이터를 장악하고 있는 건 학교에 가지 않은 아이들 무리이다. 그 음침하고 위험한 놀이터에서의 아이들 놀이란, 고등학생 남자아이들이 중학생 남자아이 ‘황순구’를 괴롭히는 것. 또한 황순구에게 여중생을 겁탈하라 명령하고 그 모습을 낄낄대며 지켜보는 것이다. 남자아이들과 황순구 사이에는 폭력으로 서열화된 명령과 복종만 있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자아이들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상납해야 하고, 그들이 시키는 나쁜 일 모두를 도맡아 해야 한다. 그 아이들에게 삶의 원리란 자신보다 더 센, 더 지독한 폭력에 굴복하는 것. 폭력의 내리물림 현상. 어쩌면 황순구를 거느리는 남자아이의 위에는 어른의 폭력이, 그 어른들 위에는 더 높은 서열의 폭력이 끊임없이 존재할 것만 같다.
“황순구 역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남자아이에게 뜯기고 있었다. 이번 달에 갖다바친 돈만 해도 벌써 이십만원이 넘었다. 용돈은 다 떨어진 지 오래고 부모에게 더이상 돈을 받아내는 것도 무리다. 오늘 놀이는 황순구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앞으로는 더욱더 많은 놀이가, 황순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황순구에게 어느 날 초등학생 여자아이 ‘권아영’이 눈에 띄게 된다. ‘슈렉’이라 불리는 여자아이 권아영. 못생기고 뚱뚱한데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짧은 팔다리를 가진 먹잇감 소녀. 그런 그녀를 발견한 황순구는 자신이 당해왔던 폭력을 고스란히 슈렉인 아영에게 되풀이한다. 돈을 상납하게 하며 게임방 아저씨에게 돈을 받고 ‘슈렉’의 몸을 팔기도 한다. 마치 그런 일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혹은 이게 바로 ‘삶의 규칙’이라는 듯 설명하고 황순구는 권아영을 폭력의 지배하에 두게 된다. 아영은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저 그 순간을,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이 황순구라는 괴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다. 아영은 충동적으로 가출을 시도한다. 우연히 발견한 책으로 가득 찬 헌책방. 모든 일에 심드렁해 보이는 주인 ‘배두식’이 사는 책들로 묻혀 있는 집, 그 안으로 아영은 몰래 숨어든다.
“오늘 하루 무사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일은, 또 그 다음날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황순구는 언제 어디서든 아영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니 도망쳐야 했다. 황순구에게서, 안전하다고 생각되지만 실은 손톱만큼도 아영을 지켜주지 않는 허울뿐인 학교와 집에서. 헌책방을 떠올린 건 우연이었다.”
헌책방은 아주 많은 사람들의 손때 묻은 책들이 묻히는 무덤이다. 헌책에 실려 온 특유의 냄새는 죽음의 냄새와 흡사하다. 세월에 묵은 책장과 썩어가는 벌레 시체, 먼지와 곰팡이가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눅눅하고 그늘진 곳에서 아영은 오히려 따듯함을, 집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온전한 아늑함을 느끼게 된다. 누구도 아영을 괴롭히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 그곳. 세상과 격리된 헌책방에서 아영은, 단 하나뿐인 안식처를 처음 경험하게 된다.
‘독한’ 이야기와 구원의 희망
헌책방 주인 두식. 사실, 두식 또한 침묵과 고독뿐인 책들의 무덤 속에 숨어사는 서른아홉 살 동성애자이다. 그는 자신의 성정체성과 마음속에 품어온 사랑에 대한 배신으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하러 은밀한 성벽과도 같은 헌책방 안에서 은둔하고 있었던 것. 소설은 재빨리 몸을 바꿔 헌책방 주인 ‘배두식’의 불행했던, 세상에서 거부되었던 지나온 과거 이야기로 카메라 앵글을 돌린다.
“누군가의 농담 한마디에 마음을 다칠 그. 끝내 자신의 갈망을 무시하고 주변 권유에 따라 평범한 여자와 결혼할 그. 일반적인 삶에 비로소 섞여들었음에 안도하면서도 뻥 뚫린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방황할 그. 욕망과 위화감, 죄책감, 혼란 속에 오늘도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그. 소심하고 겁 많은 게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면 돌아오는 건 경멸뿐이다. 그런 것이다.”
우리 사회가 동성애자에게 보내는 싸늘한 시선.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심각성만큼의 관심이나 합의가 쏠리지 않는 차별의식. 두식에게 세상은 스스로 포기하게끔 만드는, 배제와 차별만 존재하는 그런 울타리밖에 되지 못했다. 그런 두식이 울타리를 벗어나 그나마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곳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헌책방뿐이었다. 두식은 자신의 집에 숨어든 아영을 발견하자마자 심하게 훼손당한 아영의 모습을 보며 동류의식을 느낀다. 아영이 아이들의 따돌림과 폭력에 의해 내쳐진 것이라면, 자신 또한 사람의 눈으로부터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내쳐진 것과 비슷하다고 느끼던 터. 어떻게 보면 그 둘은 사회적으로 ‘문제아’라 낙인찍힌 자들인 셈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문제아’가 되어버린 약자였던 것. 그런데 이들이 바라는 소망은 누군가의 따듯한 체온, 한 뼘의 체온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꿰맨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오는 것과 상관없이 두식은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닿는 이 체온이 기쁘다.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살을 맞대는 것이 한없이 기쁘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갈구해왔던 이만큼의 체온. 고작 이만큼, 이만큼의 체온을 원했을 뿐인데.”
두식과 아영은 천천히 그 체온만큼 더디게 세상에 대해 닫아두었던 빗장을 풀기 시작한다. 잊고 있었던, 아니 잊어야만 했던 사람과 사람 간의 따스한 체온을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이다. 서로에게 그동안 누락되었던 삶의 온기를 되새겨보기도 하고, 서로의 안위에 대해 의논도 하며, 미래와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아가게 된다. 엉뚱하게 숨어들어온 웃자란 아이 아영, 그 작은 소녀가 책들의 무덤으로 둘러쳐진 헌책방 그곳에서 삶을 훼손당한 남자 두식에게 삶의 회복이라는 화두를 던져준 셈이었던 것.
“딸이야. 두식은 제 입에서 나온 말이 어쩐지 부끄럽지 않다. 거짓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화끈거리던 뺨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두식이 안개 낀 골목에 발을 내딛는다. 아영은 어디로 갔을까. (……) 두식은 서슴없이 뛰기 시작한다. 뚱뚱하고 뻔뻔한, 버릇없는 불청객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영은 두식에게 체온을 나눠준 유일한 사람이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낡은 몸으로 걸어내야 한다
칠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작가 안보윤이 꾸준하게 이야기해온 키워드들은 하나같이 주로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벌어지는 난폭한 사건 사고에 관해서였다. 음지에 사는 이들에게 그 사건 사고는 평범한 일상이 된 지 오래고, 잔잔한 수면 아래 잠복하고 있는 절망은 어느 새 희망이라는 단어를 대체하고 있다. ‘미래’란 말을 믿지 않는다. 희망은 더이상 그들에게 일상의 치료제가 아니며, 이미 절망이 내성화된 공간 안에서 더욱 편안함을 느낀다. 그런 그들에게 유일한 구원의 제스처는 그 낡은 몸으로 자기 앞에 놓인 삶의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뿐이다.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그들이 사는 음지의 일상이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 같더라도, 부서지고 훼손당한 몸이더라도, 그저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방법은 없다. 삶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이 불편한 진실을 작가 안보윤은 삶의 양지에 있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