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판 세상과 치열하게 싸울 내 노년이 그려지자,
온몸의 핏줄이 흥분하며 벌떡였다. 점박이에게 맞서던 소년의 심장처럼 둥둥둥.”
폭력의 역사를 환기하며 과거와 오늘을 잇는
박청용의 첫 소설집
“왜냐하면 결함 많은 우리가 가장 인간다워지는 순간은
우리의 비인간적인 비극을 고심하고 자각할 때이기 때문이다.”
_임현(소설가)
· 2023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박청용의 첫 소설집이 나왔다. 2020년 〈소설미학〉 신인 소설상에 단편소설 「아버지의 거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소설미학〉 등에 작품을 발표하며 독자와 만나고 있다. 이번 작품집에 모은 3편의 단편에 대해 소설가 임현은 “박청용이 그려낸 세 편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체제에 의한 폭력의 비극성을 환기시키고, 동시에 그로부터 희생된 개인의 일면을 포착한다”고 말한다. 역사의 원체험자가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시선으로 그리는 이번 작품집에서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지워지지 않은 역사의 흔적을, 그리고 그 기억의 중요성을 환기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한몸으로 붙으려고 발버둥질하는 닭의 몸에서 피가 철철 뿜어나왔다. 선홍색의 닭 피와 붉은 고춧가루로 뒤범벅이 된 황토 마당은 피바다였다. ‘빨갱이는 죽여도 좋아’라는 머리띠를 동여맨 왕머슴은 자기 세상인 양 춤추면서 고춧가루를 뿌리고 또 뿌려댔다. 닭의 머리와 몸통이 붙으려고 빙빙 돌자, 회리바람이 일어났다. 몸통과 머리가 맞닿았지만, 고춧가루 때문에 연거푸 실패하고 축 늘어졌다. 다시 합쳐지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았는지 닭은 회리바람 속으로 들어갔다.
_「회리바람 타는 닭」에서
표제작 「연 날리는 소녀」는 어린 시절 베트콩과의 전투 무용담을 할리우드 히어로물 이야기를 대하듯 긴장감 넘치게 듣고 자란 ‘나’의 호찌민 여행기이다. ‘나’는 관광상품화된 전쟁의 상흔을 ‘체험’한다. 당시 체험자의 시선이 아닌 그 시간을 바라보는 후세들의 시선이 작품 속에 그려진다. ‘나’는 꾸찌터널에 본 “여군 한 명이 해먹에 걸터앉아서 남자 군인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모형”을 보면서 “소풍 나온 젊은이의 연애 현장 같다”고 말한다. “앳된 남녀를 피가 튀는 전쟁터로 내몰았던 시대적 상황”의 안타까움에서 오는 바람 같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전쟁을 체험하는 내용은 베트남과 미국의 전쟁보다는 인간과 전쟁을 생각하게 한다. 작품 말미에 함께 각국의 언어로 반복하는 “더이상 전쟁은 안 됩니다!”라는 말은 작가의 목소리이리라.
두번째 작품 「회리바람 타는 닭」에 등장하는 민철은 역사학을 가르치는 대학 강사이다. 민철은 우연히 서울역광장에서 보수단체 노인들로 이루어진 시위대를 만난다. 그 무리 중에서 어린 시절 한 동네에 살았던 “왕머슴”을 발견한다. 왕머슴이 도끼로 닭의 목을 내리치던 광경은 그에게 정신질환과 만성두통을 일으킬 정도로 트라우마로 남아 ‘닭’으로 만든 음식은 모두 꺼린다. 민철은 시위대와 논쟁을 하는 젊은 청년을 보며 감히 나설 용기가 없어서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만 보는 자신에 대해 자괴감을 느낀다. 스스로를 “민주화 시대를 열정으로 살아온” “자신을 자못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탓에 “대학 강단에서 메마른 학문이나 가르치는 나약한”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운 것이다. 그날 이후 민철은 왕머슴이 그랬던 것처럼 머리와 몸통이 떨어져 회리바람을 타는 닭의 꿈을 꾼다. 그리고 오랜 시간 자신을 두통에 시달리게 한 원인에 대해 결단을 내리기 위해 손도끼를 가방 깊숙이 숨기고 집을 나선다.
마지막 작품 「개와 걔」 역시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했던 ‘나’는 노동자회를 찾아왔던 견호를 잊을 수가 없다. 견호는 빛고을 출신이라 저항 의식이 스며 있으리라 믿었던 순해 보였던 청년이었다. 하지만 조직원들이 공안당국에 줄줄이 잡혀가던 때 견호는 사라졌다. 언론은 노동자회를 북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 전복을 목적으로 한 지하 세력이라고 보도했다. 조직은 무너졌고 회원들은 체포되어 혹독한 조사와 고문을 당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부천 지역 총책인 견호만이 알고 있어야 할 하부 조직도를 공안당국이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 견호가 새로운 치안국장이 되어 뉴스에 나온다. ‘나’는 ‘걔’를 보면서 어린 시절 자신을 사납게 쫓던 ‘개’를 떠올린다. 하교 때면 언덕을 지키고 서 있던 사나운 그 개 때문에 어린 ‘나’는 항상 불안했다. 개에게 쫓겨다니며 동네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곤 하던 어느 날, ’나‘는 개를 향한 역습을 준비한다.
“결함 많은 우리가 가장 인간다워지는 순간은”
이번 작품집의 특징은 표상으로 그려지는 과거 이야기가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현재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머리와 몸통이 두 동강 난 닭이 한몸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 공포를 만드는 사나운 개 등에서 현시대의 전쟁, 폭력, 분단 상황 등이 떠오른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인간이 보여주는 폭력성에 대해 “그것은 오직 ‘개’ 같은 ‘그들’에게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 모두에게 속한 보편적인 결함일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 때문에 서로를 혐오하고 증오하면서도 어딘가 비슷한 논리로 닮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이 그의 소설을 다시 곱씹어 읽어야 할 이유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결함 많은 우리가 가장 인간다워지는 순간은 우리의 비인간적인 비극을 고심하고 자각할 때이기 때문이다.
_「해설」에서
“역사와 가려진 사회의 이면을 파헤치면서 비판과 저항의 글을 주로 썼다”는 작가는 “합평할 때마다 독자들이 외면할 것이라면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한다.(「작가의 말」) 하지만 찾는 이가 없어도 여전히 “점박이에게 맞서던 소년의 심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역사에 대한 작가의 의지를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작품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