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앞으로 우리……
사랑 갖고 농담도 거짓말도 하지 말자.”
웃기 위해 농담하는 여자와
살기 위해 거짓말하는 여자의 이야기,
박성경의 여섯번째 장편소설
“웃어보기 위해 농담하는 여자와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하는 여자의 워맨스.
이 소설에서 할리우드식 해피 엔딩 같은 건 기대하지 말기를 바란다.”
_정민아(영화평론가)
· 2023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박성경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 나왔다. 장편소설 『쉬운 여자』 『나와 아로와나』 『피우리 미용실』, 청소년소설 『나쁜 엄마』 『날마다 크리스마스』 외에도 작가는 영화 〈S다이어리〉, 〈소년, 천국에 가다〉의 각본을 썼다. 작가의 전작 인물들은 부조리한 현실과 당당하게 싸우며 읽는 이에게 희망을 준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색깔을 달리하고 몹시도 아픈 두 여자, 달희와 신정을 그린다. 달희는 자신 때문에 자식을 잃었다는 죄책감에, 신정은 자신의 고통 때문에 자식을 버려두었다는 죄책감에 웃지 못한다. 슬픔은 슬픔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달희와 신정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아픔을 느끼고 그 공감은 우정을 넘어선 감정으로 이어진다. 영화평론가 정민아는 이번 작품에 대해 “여성의 목소리로 발언하는 서사이며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그린다. 플롯이 진행되면서 여성의 눈에 비친 가족, 이웃, 사회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러는 가운데 비범하지 않은 인물들이 연대와 우정으로 문제를 직시하며 서로의 성장을 돕는다”(「해설」)고 말한다. 시나리오작가이기도 한 작가는 오랜 시간 놓지 못했다는 두 여자의 아픔을 한 편의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듯 전한다.
2009년에 쓰기 시작했는데 2023년이 되었으니 셈이 약한 나로선 지난 세월을 헤아리기가 힘들다.
나보코프였나? 작가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매달리고 싶은 주제를 평생에 걸쳐 집요하게 써나가야 한다고. 이 소설을 붙들고 있는 내내 나는 이 말에 줄곧 마음이 갔다.
_「작가의 말」에서
웃기 위해 농담하는 여자
서른일곱의 달희는 남편 오재의 꽃이 되어 그녀와 관계된 모든 것들과 함께 그의 삶에 공생한다. 달희는 남편 오재 덕에 오픈카와 호텔 피트니스회원권을 가졌고 백화점에서 명품을 현금으로 결제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의도한 불행’이다. 그녀는 화장실 장식장에 손목을 한 번에 그을 수 있는 면도칼을 숨겨두고 있다.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죽지 않고 사는 인물이다. 죽음은 쉬우니까. 불행을 숨기고 웃을 일이 없는 달희는 웃기 위해 농담을 한다. 달희의 불행이란 교통사고로 죽은 딸 희아다. 어린이집에서 체험학습을 갔던 날 빗길 교통사고로 희아를 잃었다. 운전기사의 무리한 끼어들기 탓이었다. 운전기사는 탈출했지만 창문을 깨지 못한 아이들은 모두 불타는 버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날은 달희와 소우의 결혼기념일이었고, 둘은 오래전 예매해둔 콘서트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전날 밤 미열이 있던 희아를 억지로 어린이집으로 보낸 건 달희였다. 달희는 희아의 사고 이후 버스를 타면 비상용 망치부터 찾았다. 타고 있던 버스에서 비상용 망치를 들고 집으로 온 날, 달희는 소우와 이혼했다. 그날부터 달희는 불행만을 쫓아다녔다. 불행만이 삶의 이유였던 달희는 스스로가 경멸해오던 삶을 좇기 위해 오재와 재혼한다. 달희의 농담은 “불행한 자가 불행을 견디다못해 택한, 삶을 연명해나가는 아주 비참하고도 처절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달희는 오재와도 불행해지지 않았다. 달희가 원한 건 한 줌의 잡티도 없는 완전무결한 불행이었지만, 지리멸렬하고 나태한 일상 속에서 달희는 무감각해져만 갔을 뿐이다. 나태한 삶은 불행한 삶이 아니라 무감각한 삶이다. 타인과 더불어 불행해진다는 건, 타인을 통해 불행해질 수 있다는 건 달희의 배부른 생각이었다. 도대체 아이를 잃은 엄마가 누구와 함께 무얼 할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_「농담과 거짓말」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하는 여자
미혼모로 어렵게 신정을 키워온 엄마는 딸이 레즈비언이란 걸 알았을 때 하늘이 노래졌다. 신정이 학교에서 강제로 아웃팅을 당하고 아이들에게 ‘따’가 된 날, 교복 치마가 온통 애들이 던진 급식 반찬으로 얼룩덜룩해진 채 머리는 산발이 되어 운동화까지 뺏기고 맨발로 돌아온 날, 신정이 학교를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하자 신정의 엄마는 거의 실성한 상태에서 신정을 때렸다.
_「농담과 거짓말」에서
신정은 학교에서 강제로 아웃팅을 당한 이후 집밖에서도 집안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다. 신정이 열여섯에 엄마의 남자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을 했을 때 엄마는 신정을 쫓아냈다. 미혼모로 신정을 낳아 기른 엄마는 항상 자신이 아픔이 더 컸다. 신정은 엄마에 대한 복수심으로 미혼모 시설에서 혼자 마리아를 낳았다. 마리아를 업고 집을 나온 신정은 7년 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신정은 아이를 미혼모 쉼터에 맡긴 채 배달이나 대리운전을 하며 딸 마리아에게 꼭 데리러 가겠다고 했던 약속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간다. 그 약속은 미안하게도 1년마다 한 살씩 늘어났다. 짧은 머리에 언제나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는 신정은 자신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이 필요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고 신정은 그것이 생존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지독하게 슬픈 두 여자의 ‘워맨스’
신정의 키스는 격렬했지만 달희의 입술은 붓지 않았다. 신정의 혀는 달희의 입술에 아무런 자국도 흔적도 남기질 않았다. 달희의 가슴에 아무런 생채기도 남기지 않은 것처럼.
_「농담하는 여자의 거짓말」에서
달희의 오픈카와 신정의 배달 오토바이의 접촉사고로 둘은 처음 만난다. 사고현장에 떨어진 신정의 지갑에서 달희는 대리운전회사 명함을 발견하고 신정에게 연락을 한다. 슬픔을 온몸으로 토해내는 달희와 슬픔을 고스란히 감춘 신정의 만남이지만 실없는 농담과 거짓말에서 둘은 서로의 아픔을 발견하고 이끌린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법은 “누구나 각자 삶을 견디는 방식”을 인정하고 “농담에 기대어 살거나, 부러 거짓말만 일삼는다 해도, 그 방식이 나의 상식에 어긋난다고 해서 나무라지” 않는 것이다. 달희와 신정은 마지막 만남에서 거짓말게임을 한다. 장난처럼 오가던 말 속에 그들은 각자의 아픈 진실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달희는 신정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신정은 달희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리고 달희는 신정의 눈물을 닦아준다. 그들이 아픔을 꺼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들어주고 함께 아파해줄 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그들 아픔의 피해자였지만 죄책감으로 스스로 자신을 벌하면서 살아왔다. 누군가 당신은 가해자가 아니라는 말을 건네고 눈물을 닦아줄 이는 없었던 것일까.
그녀들의 아픔은 개인의 아픔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과 무책임함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기에 그녀들의 슬픈 비밀은 더더욱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개인의 서사에서 사회공동체의 서사로 나아가는 소설의 구성은 그래서 더욱 큰 울림을 준다.
_「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