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시가 움트는 자리, 詩란
각기 다른 시의 면면이 나란하게 이어져나갈
시의 흰 건반 시의 검은 건반, 詩란
시를 이야기하는 난다의 새로운 시리즈!
◎ ‘詩란’을 시작하며
특별히 ‘시’를 콕 집어서 화제로 삼은 자리는 맞다. 그러나 그다음 ‘란’이라 할 적에 이는 거창하게 지은 집이나 정리정돈을 완전하게 마친 방을 위시하는 건 아니다. ‘詩란’은 모서리거나 귀퉁이거나 가장자리와 같은 구석의 말을 사랑하는 이들의 면이다. 발음 끝에 절로 따라붙는 물음표처럼 미완으로 발산되고 자유로 수렴된다. 어쩌다 시의 ‘알’로도 읽히게 된 건 시치미가 그러하듯 시가 우연히 낳은 소소한 재미일 것이다.
시란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도 아니나 그 품을 가두려는 정의 또한 아니다. 시론보단 가벼이, 아포리즘보단 헐거이, 시산문보단 느슨히, 그러므로 닫기보다 열기에 관심을 둔 글들이다. 시라는 세계, 그 한 세계가 하나의 알이라면 깨어서 여는 것이 도끼일 수도, 주문일 수도, 날갯짓일 수도 있겠다. 아무려나 줄탁동기(啐啄同機)이니, 쓰는 이와 읽는 이에게 동시로만 열릴 세계임은 틀림없으리라.
◎ 슬픔은 물 얼룩처럼 멀리, 『비로 만든 사람』
“너를 안으면 꿈의 바닥까지 잠길 것이다.
춤을 춘다면 꿈의 끝까지 흘러갈 것이다.
너와 잠들면, 나는 익사체로 건져질 것이다.
드디어 슬픔은 물 얼룩처럼 나를 남긴 채 멀리 사라질 것이다.”
1.
장난감, 술, 비, 가을, 비밀, 미래, 자낙스, 삐삐 롱스타킹…… 시인은 이 글에서 열일곱 가지의 사물과 관념들을 소환한다. 그가 이들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오로지, ‘시’. 각 장에 부제로 따라붙은 열일곱 개의 질문 역시 모두 시를 주어로 하고 있거나 시의 어떤 특성에 대해서 묻는다(“시는……” “시의 침묵은……” “시의 그물은……” “시의 천사는……”). 결국 모든 질문은, 그리고 이 질문들에 뒤따라오는 모든 문장은 시라는 정체가 모호한, 어둠 속에서 오직 윤곽으로만 감지되는 존재를 밝히려는 노력인 셈이다.
허나 시를 향하는 시인의 말은 결코 시에 대한 이론이나 방법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시인에게 시는 생활과 동떨어진 채 홀로 고고한 삶을 영위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되레 시인은 시라는 프리즘을 통해 삶을, 사랑을, 슬픔을 이야기한다. 시가 되든 시가 되지 않든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 결국 삶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드디어 시간이 흐르고, 나는 시가 삶을 구원한다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시를 쓰지 않아도 삶을 살았지만, 삶을 살지 않는 한 시를 쓸 수는 없을 것이기에. 오히려 삶이 시를 구원한다. (「혼돈」, 132쪽)
2.
삶에 대해 묻지 않는 자는 죽은 자이고, 사랑에 대해 묻지 않는 자는 살인자이다. 모든 삶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죽거나 죽이기 때문이다. (「고독」, 100쪽)
‘삶을 살지 않는 한 시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삶이 시를 구원한다.’ 그렇게 시를 이야기하는 시인의 언어는 삶을 향해 간다. 그러나 그 여정 속에서 시인은 결코 시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가 삶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화려하지만 공허한 독백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가 우리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과정은 우리가 그 시를 잠시 내려놓았을 때, 지속되는 삶을 통해 그 시가 우리에게 준 시간이 무엇이었는지 되묻는 그 순간(154~155쪽)에 완성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삶과의 접촉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말한다. 이때 시인이 말하는 삶은 결코 화려하지도 이상화되지도 않은 것, 단지 매일의 하루하루가 켜켜이 쌓이며 그 윤곽이 드러나는 ‘일상’이다. 이 ‘일상’ 속에는 하루하루의 만남이 있고 이별이 있으며, 사랑이 있고 죽음이 있다. 시인은 말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고도 지속되어야 하고 지속될 수밖에 없는 일상이라면, 일상 속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숭고함이 들어 있다고 믿는 편”(「환상」, 164쪽)이라고.
3.
열일곱 개의 장과 한 개의 부록으로 나뉘는 이 책을 이루는 것은 그 길이도 서로 상이한 여러 개의 단상이다. 시인은 후기에서 한번 썼던 글을 “그냥 가져오지 않고 토막토막 잘라왔다”고 고백한다. 한 장을 이루는 여러 개의 단상은 기승전결의 형태를 띠지도 않으며 선형적이고 직관적인 논리 구조의 지배를 받지도 않는다(물론 열여덟 개의 서로 다른 장들 사이의 사정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사지의 이곳저곳이 절단된 언어를 읽어내려가며 우리는 있던 것이 없어진 자리를 더듬는다. 없는 것이 있었던 순간을 떠올린다. 시인의 마음이 가닿았던 지점을 우리는 환상통을 겪는 환자처럼 통렬하게 느낀다. 불구의 언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이 느낀 것을 전해야 하는 언어는 탄생하는 순간 그 몸과 마음에서 벗어남으로써 그 근본에 있어서부터 불구였던 것은 아닐까. 시인은 태생부터 불구였기에 불가능에 머물렀던 언어를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스러운 이별의 순간, 언어가 찢어지며 도려내어지는 순간을 직시한다. 그렇게 “영혼이 없어서 영혼을 생각하게 하는 요리”처럼 시를 이야기하는 곳곳이 잘린 그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말해진 것 너머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 말해질 수 없는 것의 존재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