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이 경손(慶孫)이요 아호는 도향(稻香) 그리고 필명은 나빈(羅彬)으로 불리는 작가의 생애는 불과 25세로 끝을 맺는 기구한 편력이었다. 나주가 본적이고 서울이 태생인 도향의 가문은 대대로 의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의 조부는 한방의 명의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그의 부친도 양의로 가업을 계승했으며 도향은 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공옥 보통학교를 마치고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배재고보를 졸업했다. 애초에는 가업을 따라 경성의전에 진학했으나 문필에 뜻을 둔 도향은 끝내 중퇴하고야 말았다. 당시 무르익기 시작하던 일본 문단에 크게 자극되었고 더욱이 육당이나 춘원의 작가 활동이 부러워서 그의 뜻은 더 굳어졌다고 전해진다. 20세 미만의 젊은 시절부터 일종의 문학 중독에 걸렸던 도향은 학교 공부는 통 하지 않고 소설 시집만을 밤새워 읽었다고 한다. 곧잘 신통치도 못한 습작들을 신문에 투고하기도 하고 《문우(文友)》란 잡지를 손수 만들어도 보았다. 문학 청년 도향은 의전을 중퇴하고 비장한 각오로 홀홀히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엄격한 그의 조부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로 좀처럼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상심의 귀국을 해야 했다. 이겻이 계기가 되어 도향은 방랑 생활을 남달리 즐겼다고 한다. 항상 그는 방랑 생활이 좋아 하고 너털웃음을 껄껄 웃으며 백조사에서 몇 달씩 묵기도 하고 서울 있으면서도 여관 살림을 하기가 일쑤였다. 한때는 계명구락부에서 《계명》의 편집도 하고 안동으로 가서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도서에서도 일했고 빙허 현진건 횡보 염상섭과 함께 기자 생활도 한 적이 있었다. 25세의 한창 젊은 나이로 요절한 도향에게는 한 두가지의 로맨스도 있었지만 한결같이 쓴잔만을 마셨다고 한다. 첫 번은 한국에서 전형적 아가씨와 다음은 일본에서 신식 멋쟁이 아가씨와의 로맨스였다. 일본에서 최모 양을 에워싸고 진모 씨와 라이벌이 되어 경쟁하다가 끝내는 돈의 위력으로 실연한 도향은 귀국해서 1년만에 폐병으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