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池河連)
1912~미상. 경상남도 거창 출생. 본명은 이현욱(李現郁). 일본 도쿄 쇼와여자교등보통학교 졸업. 도쿄경제전문학교 수학. 천석지기 집안의 여러 남매 중에 고명딸로서 어릴 적엔 마산에서 성장했다고 알려진다. 1935년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임화(林和)와 결혼하였다. 1940년 <문장>지에 <결별>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광복 직후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고, 1947년 임화와 함께 월북하였다. 임화는 1953년 8월 미국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북한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고, 그 후 지하련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저서에 <체향초(滯鄕抄)(1941), <가을>(1941), <산길>(1942), <춘추>(1942), <도정(道程)>(1946), <광나루>(1947) 등이 있다.
계용묵(桂鎔默)
1904~1961. 평안남도 선천 출생.
1925년 <조선 문단>에 <상환>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때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일했으며, 1943년에는 천황 불경죄로 2개월간 수감되었다. 광복 직후에 좌우익 문단의 대립 속에서 중간적 입장을 고수하며 정비석과 함께 잡지 <조선>을 창간하였다.
저서에 <병풍에 그린 닭이> <백치 아다다> <별을 헨다> 등이 있다.
이효석(李孝石)
1907~1942. 강원도 평창 출생. 1928년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적인 문체와 서정적인 분위기의 작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도시와 유령> <마작철학> <깨뜨려지는 홍등> 은 도시 빈민층과 노동자, 그리고 기생의 삶을 통하여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3부작 <노령근해> <상륙> <북국사신>에서는 관능적이며 성적인 인간 본능을 폭로하기도 했다.
저서에 <메밀꽃 필 무렵> <돈> <석류> <화분> 등이 있다.
윤기정(尹基鼎)
1903~미상. 서울 출생. 1922년 9월에 결성된 염군사에서 활동하였으며 1924년 서울청년회에 소속되어 최승일(崔承一), 송영(宋影), 박영희(朴英熙) 등과 더불어 염군사와 파스큘라(PASCULA: 1923년경에 발족된 프롤레타리아문학단체)를 단일조직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1925년 조선 프로예맹의 서기국장과 중앙위원을 역임하였고 1927년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아나키스트와의 논쟁에 참여하였다. 1931년과 1934년에는 두 차례의 카프 검거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각각 기소유예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광복 후 송영, 한설야(韓雪野), 이기영(李箕永) 주도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서기장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저서에 <새살림>(1927), <미치는 사람>(1927), <자화상>(1936), <사생아>(1936), <적멸 寂滅>(1936), <거울을 꺼리는 사나이>(1937), <아씨와 안잠이>(1937), <천재 天災>(1937) 등이 있다.
채만식(蔡萬植)
1902~1950.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 개벽사 등의 기자로 활동했고, 1936년 이후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1924년 단편 <조선문단>에 <새길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당시의 현실 반영과 비판에 집중되어 있다. 식민지 치하에서의 궁핍한 농민, 지식인의 고뇌, 도시 하층민의 몰락, 광복 후의 혼란상 등을 실감나게 그렸다. 저서에 <인형의 집을 나와서> <탁류> <천하태평춘>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등이 있다.
나도향(羅稻香)
1902~1926. 서울 출생.
1922년 현진건, 홍사용, 이상화, 박종화,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 참여하여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윤리와 물질적 탐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당대 현실과 사회를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저서에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