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의 시는 주요한 김억 등을 통하여 모색 실험된 한국 현대시의 수준을 그 형태와 시정신 면에서 한 단계 올려놓은 공적을 남겼다. 특히 만해는 불교적 사유와 상상력에 기초하여 우리 시의 전통에서 부족했던 형이상학적 깊이를 시에 더해 주었다. "님의 침묵" 작품 분석 전 10행의 산문율을 지닌 시로 종결 어미는 모두 경어체를 차용하여 여성 어조를 띰으로써 애절한 사랑의 정감이 더욱 깊게 느껴지는 작품인데 각 행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기로 한다. 1행은 님이 떠나갔다는 현실 인식에서 시작된다. 님이 갔다는 사실은 화자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는 것이 반복을 통해 토로되며 직설적 진술에서도 그 충격의 크기를 짐작하게 된다. 2행은 님이 떠날 때의 상황을 제시한다. 푸른 산빛 과 단풍나무 숲 의 대조에서 절망에 빠진 화자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푸른 산빛 이 여름과 무성함을 표상한다면 단풍나무 숲 은 가을과 쓸쓸함을 표상한다. 그러하다면 푸른 산빛의 계절은 나와 님과의 사랑이 충만하던 시절이 되며 단풍나무 숲의 계절은 헤어짐의 쓸쓸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한 쓸쓸한 공간으로 나 있는 작은 길을 걸어서 님이 떠났다는 사실이다. 극화된 헤어짐의 장면이다. 멀리 사라져 가는 길이 주는 소멸감은 님을 떠나 보낸 화자의 상실감을 드러낸다. 또 그런 길을 참아 떨치고 갔다는 사실에서 사랑의 파탄이 사랑 자체의 파탄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참아 는 중의적이다. 부사 차마 와 인내의 뜻 참아 가 결합되어 있다. 차마 어쩔 수 없이 님이 떠나갔을 수도 있고 아픔을 꾹 참고 떠났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의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깨어질 수밖에 없었음이 분명해진다. 3행은 계속되는 절망감의 표출이다. 님과 나의 맹서가 깨어지고 만 슬픔의 크기를 광물 이미지로 포착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황금의 꽃 이라는 은유는 광물과 식물의 결합에서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의 절대성을 표출한다. 차디찬 티끌 에서 차디찬 이란 촉각 이미지는 사랑이 화자에게 준 절망의 정도를 보여 준다. 한숨의 미풍에 과거의 꿈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회한의 심정이 노출되고 있다. 한숨의 미풍은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허무의 표상이다. 황금의 꽃 에서 보이는 견고한 이미지와 이 미풍의 허망한 이미지의 대립이 드러난다. 4행. 날카로운 첫 키스 는 물론 님과 나의 만남을 뜻한다. 그러나 그 만남(키스)을 날카롭다고 한 데서 님과의 사랑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고 나의 온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정도의 충격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뜩할 정도로 사랑은 강렬하게 찾아왔고 그리하여 나의 님이 가고 없다는 상실의 재확인이다. 날카로운 키스라고 한 데서 님과 나의 만남이 단순한 애정에 의한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달콤한 키스가 정감을 불러오는 데 반하여 날카로운 키스는 정신적 충격의 의미가 더 강하다. 여기에서 일이 다층적(多層的) 실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화자는 님에게 절대적 사랑을 바친 것이다. 5행도 님이 나에게 절대적 존재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눈멀고 귀멀 정도의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에 차라리 눈멀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차라리 귀멀었다는 표현은 역설이다. 이 역설은 사랑의 절대성을 극도로 높이는 효과를 준다. 6행. 사랑하면 헤어질 날이 오는 것이 엄연한 법칙[會者定離(회자정리)]이라 염려하기는 했지만 뜻밖에 찾아온 이별 앞에 슬퍼하는 화자의 심정이 표출되어 있다. 7행은 반전(反轉)이다. 이별을 슬픔으로만 인식하면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이 되고 말며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나 스스로 깨뜨리는 것이 되므로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것을 알기에 크나큰 슬픔의 힘을 옮겨서 희망으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법적 지양이다. 정신적 극복의 한 수단으로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하는 화자의 내적 극복 방식을 알게 한다. 이는 만해 특유의 사유 방법이다. 님의 침묵 88편의 시상(詩想)은 모두 변증법적 극복의 논리에 의한다. 그것은 불교적 사유가 그렇기 때문이다. 7행의 사유 전환은 8행으로 이어진다. 6행의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절망은 거자필반(去者必反)의 희망으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교의 윤회설이 바탕에 깔려 있다. 윤회설은 존재는 일정한 정체성을 가지지 않으며 여러 가지의 양태로 변전되는 것의 우주의 섭리라고 말한다.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고 신생은 유전한다. 9행. 님과 나의 사랑은 파탄에 이르지 않았다는 자기 선언이다. 현실적 상황으로는 사랑의 관계가 파탄되었지만 정신적으로 이어진 사랑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으며 내가 그 정신적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 한 사랑은 지속된다는 승화된 인식의 표출이다. 10행. 그렇기 때문에 내 충만한 사랑의 기쁨에서 솟구쳐 나오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부재에도 넘쳐나기만 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만해는 님의 부재 공간을 정신적 사랑으로 메우려고 한다. 님의 부재 충격이 크면 클수록 더 큰 사랑의 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적 차원의 극기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엄청난 역설에 의한 정신적 극복만이 그것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해 시의 우수성은 이렇게 정신적 지양의 태도가 서정적 시어로 표출되고 있는 점에서 비롯된다 하겠다. 이 작품은 곧 나의 사랑 임을 만해는 노래한다.